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공감] 아름다운 변호사들 떴다

등록 2004-07-23 00:00 수정 2020-05-03 04:23

법을 약자의 도구로 쓰려는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에 공감하시렵니까?

▣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상담소 문을 여니 조근조근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은 책장 너머 1평 남짓한 상담실이다. 한 성매매 피해 여성이 앉은뱅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염형국(30) 변호사에게 사연을 쏟아내고 있었다. 업소에 이리저리 팔려다니면서 업주들로부터 받은 학대를 말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간신히 업소를 탈출했지만 업주가 “그동안 진 빚을 갚으라”며 대여금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염 변호사와 피해 여성이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옆방에는 비슷한 과정을 겪은 대여섯명의 여성이 상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익활동, 가욋일 아닌 본업

염 변호사는 매주 목요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이곳 성매매여성 지원단체로 출근한다. 상담의 대부분은 선불금을 둘러싼 고소·고발 사건이다. 도망나온 여성이 업주로부터 고소를 당했을 때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염 변호사는 피해 여성의 상담부터 고소장 작성, 답변서 작성 등 다양한 일을 한다.

염 변호사는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共感) 소속 변호사다. 공익변호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염 변호사의 일은 오롯이 공익활동이다. 염 변호사는 이곳 상담소 말고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교남소망의집 등 장애인단체 2곳의 법률 지원도 함께 맡고 있다. 아직은 생소한 ‘공익변호사’는 말 그대로 공익과 관련한 법률 서비스를 지원하는 변호사다. 물론 그동안 변호사들의 공익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업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관심과 역량에 따라 ‘가욋일’처럼 이뤄져왔다. 반면 ‘공감’의 변호사들은 법률 지원이 필요하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시민사회단체에 파견돼 상담과 자문을 하고 소송서류 작성, 법률안 마련 등 다양한 법률 서비스를 해준다. 이들에게 공익활동은 가욋일이 아닌 주업무다. ‘공감’은 아름다운 재단의 공익변호사기금으로 운영된다. 즉, 월급은 기금에서 받고 일은 밖에서 하는 셈이다. ‘공감’의 첫 지원 대상으로 지난 2월 11개 단체가 선정됐고, 소속 변호사 4명이 ‘파견근무’ 중이다.

염 변호사가 ‘공감’에 들어선 계기는 우연이었다. 평소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고 싶었던 그는 연수원 수료를 앞둔 지난해 7월,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 변호사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날렸다. “공익적인 일을 하고는 싶은데, 막막하더군요. 아는 사람도 없고… 딱히 조언을 구할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뵌 적도 없는 박 변호사님께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박 변호사는 “이름만 있고 돈은 없었던” 공익변호사기금을 기반 삼아 아름다운 재단에서 일해볼 것을 제안했다.

지난해 말 한 독지가가 기부한 1억5천만원으로 종자돈이 마련됐고, 변호사 모집공고를 냈다. 취지에 공감한 소라미(30), 정정훈(34), 김영수(34) 변호사가 찾아왔고 드디어 올 초 문을 열 수 있었다.

이들이 받는 급여는 ‘세금을 떼고 나면 법률구조공단 지원 대상이 될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애초 소라미 변호사가 갈등했던 부분은 급여보다는 “나 같은 초임 변호사가 과연 도움이 될까” 하는 걱정이었다. 언젠가는 하고 싶었지만 공익변호사의 이름을 걸고 첫발을 내딛는 건 부담이었다. 지금 할 것인지, 경력을 쌓고 나중에 합류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처음에 같이 시작한다는 데 더 의미를 뒀다. 소 변호사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다시함께센터와 전북성매매여성현장상담센터 등 성매매여성 지원단체와 이주여성인권센터 등 3곳의 여성단체에 법률 지원을 나간다. 국제결혼을 한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이혼과 체류·양육 문제 상담부터 선불금 사기로 고소당한 성매매 여성 지원, 업주 고소 등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1차적 법률 지원이 주된 업무다. “법률 상담을 하러 오시는 분들은 자력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분들이에요. 제가 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상담받는 분들이 안도하고 고마워하시는 걸 보면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오히려 더 많이 공부하고 성장한다”

정정훈 변호사는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외노협)와 아시아의 친구들 등 이주노동자 단체에서 일한다. 불법 작업장에서의 산재와 강제 퇴거 문제 상담, 다음달 시행되는 고용허가제 개정안을 마련하는 일까지 모두 정 변호사의 몫이다. 녹색연합에서 잠깐 자원활동을 했다는 정 변호사는 아름다운 재단의 채용광고를 보고 약간의 고민 끝에 지원했다. 돈이라는 원초적인 문제가 걸리긴 했지만, 가족을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정 변호사는 파견단체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장의 법률 지원을 하면서 “오히려 더 많이 공부하고 성장한다”는 설명이었다. 주어진 업무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발굴’할 수 있어 기대 이상으로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다들 일 욕심이 많아 ‘아무도 안 하고 싶어하는’ 팀장을 떠맡게 된 김영수 변호사는 대학 시절 “법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공익법 운동에 매료됐다. 김 변호사는 1주일에 3일은 재단 업무를 하고, 하루는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법률 상담을 한다. 노숙인이 명의를 빌려줬다가 졸지에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리는 사건이 많고, 일용 근로를 나갔다가 당한 산재 신청, 폭행당했을때 구조 신청 등 갖가지 상담이 들어온다고 했다. 좀더 많은 시간을 현장에서 보내고 싶지만, “누군가 1명은 안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김 변호사가 ‘욕심’을 포기했다. 처음에 걱정하던 가족들은 지금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김 변호사의 누나는 아예 공감의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들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각자의 파견단체에서 근무하다가, 금요일에는 재단 사무실로 모인다. 이날은 한주 동안의 업무를 공유하고 공익활동에 대한 ‘학습’을 하는 날이다.

‘처음’ 시도되는 조직인 만큼 보람도 크지만, 가끔은 ‘처음’이라는 한계에 부딪치기도 한다. 4명 모두 초임인데다 조언해줄 선배가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자력갱생 시스템이다. 단체에 파견되기 전 법무법인 한결과 천지인, 김앤장, 민주노총 법률원 등 4곳에서 한달 동안 수습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현장에서 부딪치는 복잡다단한 사건을 다루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소 변호사는 “판사로 일하는 연수원 동기들이나 지도받았던 변호사님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묻는다”며 “1~2년 지나 내부적인 노하우가 생기면 지원하는 단체에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이들은 자신들이 ‘공익’이라는 이름값을 하고 있는지 걱정했다. 정 변호사는 “처음으로 공익변호사라는 이름을 달았는데, 아직은 미숙하고 서투른 점이 많다”고 털어놨다. 현장에서 필요한 도움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4명의 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점도 고민이다. 운동적인 요구와 실제 법적용의 간극이 크다며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공익변호사기금 바닥나는데…

요즘 들어 이들은 ‘실존적인 고민’에 빠져 있다. ‘공감’의 운영 기반인 공익변호사기금이 몇달 안 되어 바닥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 독지가가 기부한 1억5천여만원으로 시작했지만 변호사 4명과 간사 1명 등 5명의 인건비로 매달 1천여만원이 나가다 보니, 이제는 여섯달치밖에 남지 않았다. 월급의 1%를 기부하는 ‘1% 기부자’는 2004년 7월 현재 33명에 불과하다. 김민경 간사는 “지난달 한 로펌이 다음달부터 매달 100만원을 내겠다는 의사를 전해와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르긴 했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공감 활동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은 이들에게 작은 즐거움이다. 지난달부터 사법연수원생 2명과 미국 로스쿨 학생 1명이 인턴십을 하고 있고,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변호사들도 간혹 연락을 해온다.

“‘공감’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법은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김영수 팀장의 당부다. (문의 www.beautifulfund.org·02-766-1004)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