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나라에서 불법단속에 쫓겨온 ‘국제노점상연합’ 회원들, 한국에 모여 희망을 이야기하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10살 때부터 지금까지 거리에서 과일과 야채를 팔았다. 16살 때 결혼해 아이 다섯을 낳았지만 학교에도 못 보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장사를 했다. 화장실도 물도 없는데서 장사하며 경찰들에게 많이 맞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 글도 몰랐고 법도 몰랐다. 그러나 여성노점상모임이 생기면서 글을 배우게 됐고, 나의 권리도 알게 됐다. 우리는 보육센터도 세워 장사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본다.”
인도에서 온 마흔여덞살의 여성 노점상 사리타 마니벤의 얼굴은 밝았다. 그녀가 활동하고 있는 빈곤에 맞서는 인도 여성들의 조직인 ‘자가고용여성노동자협의회’(SEWA·self employed women’s association)는 인도에서 실업 문제가 매우 심각해지기 시작한 1972년에 결성됐다. 섬유산업이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때다. 여성 노점상, 가내 수공업 노동자 등 그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힘겨워하던 여성들이 SEWA에서 모여 힘을 얻었다.
한목소리로 “우리를 합법화해다오”
이들은 지난 3월16~19일 서울 한국여성개발원과 동대문운동장 열린장터 등에서 열린 국제노점상연합(StreetNet International) 서울대회에 함께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이번 행사에는 이들 외에도 모잠비크·가나·남아프리카공화국·잠비아·케냐·베냉·페루 등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 10개 나라 15개 단체에서 온 30여명의 노점상과 활동가 대표들이 참가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국제노점상연합(www.streetnet.org.za)은 2002년 11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각국 노점상과 활동가들이 연대해 노점상을 비롯한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투쟁과 정책을 논의하고 연대를 다지기 위해 발족한 단체로 이번 서울대회가 창립 이후 첫 국제대회다. 비공식 부문 노동자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노동자’라고 여기는 공장 노동자나 사무 노동자, 공무원처럼 ‘번듯한’ 노동자가 아닌 노점상·가내수공업자·행상·가사도우미·짐꾼 등 고용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번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노점상들의 노동할 권리와 복지를 요구하고, 아동 노동을 없애기 위해 위해 노력하며 노점상 근처에 저렴한 탁아시설 등을 설치할 것,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과 단속에 맞서며 정부 당국이 노점상들과 사회적 대화에 나서도록 운동을 벌일 것 등을 결의했다. 한편 이런 사안들을 논의하는 내내 이들은 심각해지는 노점상의 문제 아래에 도사린 저개발국가의 높은 실업률, 세계화 물결 속에서 정리해고와 유연화로 그나마 있던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농촌 경제의 붕괴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국제노점상연합 초대 의장으로 뽑힌 김흥현 전국노점상연합회 공동의장은 “모든 나라들에서 정규직 일자리는 줄고, 임금도 심각하게 낮아지고 있다. 일자리를 아무리 찾아헤매도 취업할 수가 없어 노점을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도 한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이들에 불법이란 낙인만 찍을 뿐 이들에 대한 정책 마련을 거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국노점상연합은 한국에 80만~100만명의 노점상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으며, 최근 자체 조사 결과 임금노동자나 소규모 자영업 등에 종사하다가 노점상이 된 이들의 비중이 37.7%나 된다고 지적했다.
잠비아에서 온 엘비스 키샬라(32)는 12년째 잠비아의 제2 도시인 키투웨의 거리에서 바나나를 팔고 있는 노점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서 일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취직’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노점상을 하는 내내 단속 때문에 힘들었고, 3번 구속되기도 했다. 정부가 우리를 인정해주지 않는 게 제일 서럽고 힘들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잠비아에서 시작된 노점상연합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는 지도부와 실무팀을 구성해 노점상들의 상태와 요구를 조사하고 중앙정부, 시 정부에 대화를 요구하며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내각과 대통령에게 제출돼 검토 중인데 노점상을 노동자로 인정하고 노동법을 적용할 것, 비공식 부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합법화해달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인도에서는 법원판결로 권리 찾아
이들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점상은 불법이고 단속 대상이지만, 노점상들이 어떻게 ‘연대’하고 정부와 대화하느냐에 따라 현실은 많이 달라질 수 있으며 ‘조직화’가 희망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또한 실업과 빈곤 문제가 심각한 나라일수록 정부가 국민의 생계유지 수단으로 노점상을 인정하고 ‘허가제’ 등을 통해 노점상의 권리를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었다.
가나노총의 활동가인 제이곱 오툼은 노점상들을 조직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나노총 안에는 17개 노조가 있는데 대부분 공장 노동자가 아닌 미용사, 농민, 노점상 등이다. 오툼은 “가나도 1980년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을 받으면서 심한 구조조정이 있었다. 많은 산업이 민영화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비공식 부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전체 노동인구의 80%가 노점상 등 비공식 부문에서 일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총이 이전처럼 공장 노동자에게만 신경쓸 수 없었고, 3~4년 전부터 노점상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5810명의 노점상들이 노조에 가입했으며 도시에서는 노점상들의 지도부를 뽑아 시 당국과도 만나고 큰 시장에서는 노점상 자녀들을 돌보는 유치원과 진료소도 만들었다. 아직 지방의 상황은 달라진 게 없지만 점차 지방으로도 운동을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인도의 상황은 이들이 꼽은 가장 모범적인 사례다. 1998년 SEWA가 주도해 인도노점상연합이 구성됐다. 320명의 노점상들이 단속으로 한꺼번에 구속되자 노점상연합이 이들을 지원해 고등법원 판결로 생계형 소규모 노점상이 영업허가와 영업공간을 얻을 권리를 찾았다. 현재는 주정부나 시정부에 요구해 경찰·기업·노점상·상인·정부·소비자 등의 대표로 구성된 실무팀을 구성해 노점상에 대한 정부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날리 샤 SEWA 부의장은 “노점상은 1천만명의 인도인과 그들의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는 경제수단이자, 농민과 소비자를 이으며 값싸게 식품 등의 생필품을 공급하는 당당한 경제 주체”임을 강조했다. 노점상연합과 정부가 합의한 문서에는 노점상을 사회의 한 주체로 존중하고 노점상의 조직과 단결권을 인정하며 강제 철거나 미관을 이유로 한 노점 단속을 노점상의 생존권과 시민의 편의를 짓밟는 것이므로 엄격히 중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이번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청계천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노점상, 세입자, 영세상인 등 빈민들이 쫓겨나고 강남·안산 등 곳곳에서 용역깡패까지 동원된 노점 단속이 이뤄지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을 했다. 팻 혼 세계노점상연합 조직담당은 “서울시 역시 도시 개발을 이유로 외국의 다른 도시에서처럼 일단 노점상을 몰아내고 보자는 정책을 펴고 있지만 당장은 노점상들을 내쫓을 수 있을진 몰라도 노점상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몇해가 지나면 예전과 똑같이 될 것이다. 대화만이 해법”이라고 말했다.
실업자가 노점상되는 세계적 추세
김경림 전국노점상연합 선전1국장은 “최근 실직자와 농민들까지 노점상으로 변신하면서 외환위기 직후보다 노점상들이 더 많아졌고, 회원들을 만나러 다니다보면 젊은 노점상들이 너무 많아져 놀라게 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사설 용역들을 동원해 폭력적인 단속과 강제 철거만 하고 있다. 서울시가 말하는 기업형 노점상은 전체의 1~3%뿐이고,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한 생계형 노점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노점상이 어쩔 수 없는 생존 현실임을 인정하고 이들이 사회 안에서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제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노점상대회가 열리는 동안 한국의 청년실업률이 사상 최고인 9.1%로 치솟았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이들의 상당수는 노점상이 되어 거리로 나올 것이다. 노점상 운동이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노동운동의 한 흐름이 될지도 모르는 암울한 현실이다. 그러나 함께 모여 희망을 찾아가는 세계 노점상들의 얼굴에 그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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