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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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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게 뭔가 끝없이 묻는 매체가 21이다”

<한겨레21> 창간 때부터 몸담았던 고경태 전 편집장 인터뷰
등록 2019-04-03 10:58 수정 2020-05-03 04:29

고경태 22세기미디어 대표에게는 두 개의 역사가 있다. 하나는 의 역사다. 1994년 2월 창간 한 달 전부터 뉴스룸에 몸담아, 2006년 10월 제7대 편집장 임기를 마친 제632호까지 12년8개월 동안 과 함께했다. 창간 25주년이 그에겐 한겨레 입사 25주년이다. 안에서 지낸 시간이 을 떠나 편집장, 일간 ESC 지면 탄생, 토요판 지면 태동, 편집국 신문 부문장, 22세기미디어 대표 등을 하며 지낸 시간(12년5개월)을 여전히 앞선다.

또 하나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보도의 역사다. 1999년부터 베트남전 보도 담당자였고, 2013년 ‘1968년 그날’ 연재, 2015년 책 (한겨레출판) 출간, 그리고 2019년 2월부터 모두 다섯 차례 ‘1968년 못다 한 이야기’ 연재까지 20년 동안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보도를 지속해왔다. 이번호 표지이야기 역시 그가 다리가 된 작품이다. 4월3일부터는 광주 5·18기념문화센터에서 한 달 동안 퐁니·퐁넛 기록 전시회(한마을 이야기 고경태 기록전)를 한다. 2016년 가을부터 시작한 전국 순회 전시의 마지막 차례다.

그는 이 후원제를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 두 가지를 설명할 수 있는 적임자다. 후원자들은 이 25년 동안 쉬지 않고 지속해온 ‘퀄리티 저널리즘’(양질의 기사를 추구하는 언론)의 역사를 아는 이들이며,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보도는 이 지속해온 독보적인 저널리즘의 정수이자 진수이기 때문이다. 3월2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고경태 22세기미디어 대표이자 전 편집장을 만났다.

이번호 표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청와대 청원 사실을 류이근 편집장에게 전달하면서 “후원제와 잘 연결해보라”고 했다고 들었다.

의 순정을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 보도다. 창간 25주년, 베트남 보도에 관심을 쏟아온 시간이 20년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 문제를 파고든 매체가 이다. 끈질긴 보도가 의 강점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단순히 돕는 게 아니라 국제적인 시민운동으로 만들자는 모금운동이 1996년 10월부터 1997년 5월까지 반년 넘게 지면을 통해 이뤄졌다. 그때 모인 3억원이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건립의 밑천이 됐다. 그밖에 일본 우토로, 평택 대추리, 세월호 등 이 일회성이 아니라 시리즈로 장기 보도한 이슈가 적잖다. 양심적 병역거부나 성소수자 문제도 그렇다. 당시 우리가 청소년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문제까지 다뤘다.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은 정의로운 게 무엇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환기하는 매체다. 그런 기자들의 정의로운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독자들이 기사를 보면서 그걸 쓴 기자의 마음을 보고, 독자와 기자가 진심으로 공감하는 매체는 밖에 없고, 그 사실을 후원자들에게 보여줬으면 한다.

베트남 보도로 한국 사회가 을 인식하게 된 것 같다.

1999년 9월에 캠페인을 시작해서 50주 동안 매주 잡지 제일 앞에 2~3쪽씩 계속 썼다. 그렇게 끈질기게 한 적이 없었다. 내부 비판도 없지 않았다. 새로운 것도 없으면서 똑같은 얘기만 한다, 과도한 지면 배정이다 등등.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시 김종구 편집장으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과감히 밀어붙인 거다.

고엽제 전우회원 2천여 명이 2000년 6월7일 한겨레 사옥에 난입하기도 했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들도 그제야 돌아본 것이다. 자기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나. 전주의 한 참전 군인이 치과의사인 딸이 “아빠, 베트남 가서 사람 죽였냐”고 물어서 놀랐다는 사연도 그때 들었다. 아버지나 딸이나 둘 다 쇼크(충격)였던 거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서사는 독재정권이 젊은이들을 남의 나라 용병으로 사지에 몰아넣었다는 정도였다.

인권이 우리 국가와 우리 국민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던 시절, 은 창간 때부터 이주노동자 고향에 찾아가서 한국에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취재했다. 우리 국민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는 인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었다. 이 제기하는 모든 게 ‘쇼킹’했던 때였다.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다.

은 만들자마자 바로 서점과 가판에서 1등을 했다. 과 이 양분하던 시사주간지 시장에 우리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경쟁 체제가 만들어졌고, 이후 의 성공을 보면서 동아일보사에서 지금 의 전신인 를 창간했다.

5×7판형(책 크기의 일종)으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시원시원하게 편집했고, 매킨토시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해 디자인 요소도 강화했다. 콘텐츠는 물론 외형까지 새로운 저널리즘을 보여준 거다.

최초의 독자 담당 기자이기도 하다.

편집팀 막내로 독자면을 담당했는데, 그때 이름은 ‘단박인터뷰’가 아니고 ‘이주의 독자’였다. 독자 엽서를 보다보니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만나러 다녔다. 반응이 좋더라. 독자 인터뷰는 이 처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기자 특권이 대단할 때였고, ‘기자가 무슨 독자까지 만나’ 그럴 때였다.

국민주 신문 은 물론 은 태생적으로 독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새 주간지 제호 공모를 하면서, 박재동 화백의 탁상달력을 준다고 했다. 응모 엽서가 2만5041통이었다. 창간 첫 호에 제호 공모 뒷얘기를 쓰려고 이 엽서들을 살펴보는 데 정말 감동적이더라. 한국 언론에 이렇게 축복받은 매체가 있나.

독자는 순정이 있는 독자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는 독자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이 실릴 때면 예감이 생겼다. 아, 이 기사 나가면 독자들 전화 쏟아지겠구나. 그럼 꼭 기사 속의 그 사람을 돕겠다는 전화가 왔다. 산재 겪고 네팔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에게 보내고 싶다는 돈을 내가 받아서 달러로 환전해 보내주고 그랬다. 한편으로는 고지식한 면도 있었다. 초기에는 양담배 광고 게재에 독자들의 비판이 상당했다.

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하고 있다. 그때 사람들에게 모바일이 있나, 컴퓨터가 있나. 그때는 볼 게 없었다. 아침에 신문 보고, 전철에서 신문 보고, 잡지는 정말 고급 읽을거리였다. 지금은 종이 매체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종이 매체를 읽지 않는 시대다. 그런 환경이다. 은 활자 매체의 고유성과 디지털 트렌드 사이에서 생존 전략을 고심해왔다. 류이근 편집장 체제에서 활자 매체, 진성 독자에 집중하기로 한 것 같다.

콘텐츠와 관련해서는 기자 개인이든 조직이든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00년대를 돌아볼 때 이 기획하면 뭐든 잘되고 다른 매체로 확산된 것 같다. 1999년 시작한 ‘쾌도난담’은 팟캐스트의 원조가 된 셈이고, 2001년부터 연재한 ‘한홍구의 역사 이야기’는 대중적 역사 칼럼의 가능성을 선보였고, 2004년부터 한 ‘인터뷰 특강’은 대중과 소통하는 강연 방식의 원형이 됐다. ‘김소희의 오마이섹스’ 역시 많은 독자가 전혀 다른 차원의 기사로 기억한다. 유명한 책 필자이기도 한 한 법대 교수는 만날 때마다 김소희씨 근황을 묻는다. 당시에는 저널리즘이 ‘엄근진’(엄숙, 근엄, 진지)했는데 이 발랄하면서도 경쾌한 콘텐츠 속에 깊은 이야기를 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노동 OTL’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본다.

후원제는 2017년 고 대표가 출판국장으로 있을 때 운영했던 ‘백지TF’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7년 내가 출판국장이 되자마자 대선이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바로 큰 사건이 터졌다. 꼭 그 때문은 아니더라도 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이 컸다. 그해 가을 추정 손익을 보니 예상 적자 폭이 너무 컸다. 장기적 관점에서 매체를 챙기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후원제에 영감을 줬다고 얘기해준다면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다.

후원제로 모인 수익을 어떻게 쓸지가 과제다.

콘텐츠에 과감히 투자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 가령 외고 필진 원고료도 이참에 전향적으로 검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0자 원고지 한 장당 원고료를 계산하는데,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창간 때인 199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였다. 내가 편집장 하던 2006년에 2만달러가 됐고, 2018년에 3만달러를 돌파했다. 25년 사이 국민소득은 3배가 뛰었는데, 필자 소득은 똑같이 1만원 안팎이다. 이 잘나갈 때는 특별한 경우 2만원씩 주기도 했는데, 최근엔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우리가 다른 데보다 적게 주느냐. 특별히 많이 주는 곳을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가 텍스트를 생산해서 정당한 대가를 못 받는 사회라는 거다. 은 디지털 시대에, 몇 안 되는 고급 활자 매체다. 다른 매체와는 격이 다른 후원 모델을 운영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은 콘텐츠는 기자만 만드는 게 아니라 훌륭한 외부 필진과 함께 만든다는 전통을 세웠다. 창간 때부터. 프리랜서 작가, 사진가들을 적극 등용했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지난해 22세기미디어라는 미디어법인의 대표이사가 됐고, 가 중앙 일간지 최초로 블록체인 미디어 를 선보였다.

2017년 출판국장 할 때 설립한 법인이다. 이름은 내가 지었는데, ‘21’을 처음 내세운 에서 오래 일한 경험과 이번 작명이 무관하지 않다. 22세기를 내세운 회사는 아무 데도 없다. 22세기를 준비하는 세계 유일의 매체고, 혼탁한 면도 많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시장에서 신뢰를 창조하는 매체다.(웃음) 세계적 권위를 지닌 미국 뉴욕의 와 라이선스 제휴했다. 5월엔 조·중·동 중 한 곳이 뒤따라온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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