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떼고 20여 년간 ‘대게’라는 단어를 줄기차게 썼지요. 제가 끄적여놓은 문장 옆에 누군가 고운 ‘꽃게’ 한 마리를 그려주었던 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게’는 그 ‘게’임을. ‘게’ 대신 ‘개’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대개’의 ‘개’는 ‘개’(犬)가 아님을. 그래도 우리 동네 ‘××전복대개’ 간판을 보며 작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사장님! ‘대개’와 ‘대게’가 되게 헷갈리시죠?
저 ‘바지’가 정말 그 ‘바지’인지 합리적인 의구심을 품어보기로 했습니다. ‘게’ 트라우마 탓이라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썰’을 풀어줄 인사 섭외에 실패한 탓에 과거 신문 기사와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바지사장의 어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실제 업주가 저지르는 불법을 일정한 대가를 받고 뒤집어쓰는 ‘총알받이’ 하는 데서 ‘받이’를 따와 발음대로 ‘바지사장’이 됐다는 설(대구지방경찰청 홍보 블로그 참조) △‘바지저고리 입힌 허수아비’라는 표현에서 바지저고리란 말이 나왔고, 여기서 다시 ‘바지’만 따왔다는 설. 박경리 대하소설 엔 ‘바지저고리’가 등장하는데요. 줏대 없고 능력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핫바지’와 비슷한 뜻이지요. 그런데, 핫바지의 핫은 혹시 설마, 핫(hot)? 핫은 원래 ‘홑’ 혹은 ‘홀’의 상대 개념이라고 합니다. 한 겹으로 얇게 지은 바지가 ‘홑바지’, 두 겹 사이에 솜을 넣은 것이 ‘핫바지’입니다. 유부남·유부녀를 핫아비·핫어미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1995년 이기택 당시 민주당 총재는 김대중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서울시장 후보를 추천하고 나선 것과 관련해 스스로를 ‘바지저고리’라고 칭했습니다. 진짜 사장은 따로 있다는 의미에서 ‘바지사장’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했네요. ‘바지저고리만 다닌다’는 속담도 있는데요, 몸뚱이는 없고 바지저고리만 걸어다닌다는 뜻으로 아무 속 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990년대부터 신문 기사엔 ‘바지사장’이 대거 등장하는데요. 1990년 2월6일치 사회면에는 심야 유흥업소 단속 현장 기사가 실렸습니다. 단속 여파로 아파트나 개인주택을 이용한 불법 유흥업소가 많아졌다는 보도입니다. 더불어, 불법 영업을 하다 경찰에 걸릴 경우, 대신 처벌받는 ‘바지사장’들도 있다는군요. 주로 취업이 어려운 전과자·폭력배라 일당 3만~5만원에 형을 대신 살아주기도 했습니다. 남은 건 ‘몸뚱이’뿐인 사람들의 생계 수단이었던 셈이네요. 세월이 흐르면서 바지사장의 유형도 다양해졌는데요. 코스닥 기업 대표 중에는 주가 띄우기용으로 영입된 바지사장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출판물이든 인터넷이든 ‘치마사장’이란 표현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몇 년 전부터 자녀 뒷바라지에 열성인 아빠들을 일컬어 ‘바짓바람’이란 표현을 쓴 언론 보도가 있는데요. ‘치맛바람’에서 따온 표현인 듯하네요. ‘가짜 여자 사장’이 급격히 늘어나면 ‘치마사장’이란 신조어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을 듯합니다.
요즘 답답하기 짝이 없는 정국 상황을 보고 있자면, 우리 사회의 실세는 ‘국정원’이 아닌가 싶은데요. 이러다 대통령마저 ‘바지사장’ 되는 건 아니겠지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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