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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며 천년의 사랑을 배신하다

[맛있는 뉴스] 부글부글
등록 2011-08-24 15:45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박미향

한겨레 박미향

‘천년의 사랑’이었다. 온 국민이 ‘그들’에게 바친 애정은 가수 박완규의 노래 이라는 제목으로 부족할 정도다. 천년만년, 백만년 정도는 되는 사랑이었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놀거리 없는 10대들이 어른 눈치 안 보고 놀고 싶을 때 만만하게 찾는 게 그들이었다. 술 마시지 않고 취하는 법을 공부하기 제격인 곳이었다. 술 취한 아저씨들은 더 그들을 찾았다. 술 마시고 취한 기분을 더 취하게 만드는 재주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남녀, 노소, 이주노동자, 재중동포 모두 그들을 찾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단연 가혹한 노동시간을 감내하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좋은 벗이었다. 말하자면 영상가요반주기 제조업체 금영과 티제이미디어가 벌이는 사업은 박애주의 사업이다.

그들은 어디든 있었다. 살바도르 달리의 과 비슷한 초현실주의적 장면을 진짜 현실에서 봤다. 해변 나뭇가지에 흐물흐물 녹아내린 시계가 걸려 있는 그림이 기억나시는지. 2000년대 초반이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모이는 종묘공원에 우연히 들렀다. 더운 여름 늦은 오후였다. 캔음료로 목을 축이는데 멀리서 쿵작 소리가 들려왔다. 종묘공원 잔디밭 근처 벤치에서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방 기계에서 쉴 새 없이 나훈아의 라거나 제목을 알 수 없는 트로트 반주가 흘러나왔다. 푸른 나무와 풀 사이에 노래방 기기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서 간이 발전기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노래방 기기를 둘러싸고 파나마 모자에 흰 면옷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막걸리에 얼큰히 취해 할머니들과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초현실주의적이었다. 김홍도의 를 살바도르 달리식으로 비튼 이미지랄까? 금영과 티제이는 한국적 초현실주의 퍼포먼스를 낳았다.

그래서 8월18일치를 펼쳐보다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7~2009년 노래방 기기(영상가요반주기)와 신곡 업데이트 가격을 짬짜미(담합)해 인상한 (주)금영과 티제이미디어(주)에 시정 명령과 함께 각각 41억1700만원, 15억57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8월17일 밝혔다. 국내 관련 시장 매출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 업체는 다달이 영업부서장들이 만나 대리점에 대한 할인 경쟁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가격 인상안을 협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는 현재 전국에 노래방 3만5천여 곳이 영업 중이며, 관련 시장 규모는 연간 1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금영과 티제이미디어 양사 임원과 영업부장이 매달 만나 구체적인 인상 방안을 협의했다고 알려졌다. 그들도 뒤풀이 때 노래방에 갔을 게다. 노래방 기기 라이벌 회사 직원들이 만나 가격 인상폭을 담합하고, 함께 노래방에 가서 단합을 과시하는 장면은 너무 현실적인 장면일까, 초현실주의적 장면일까. 확실한 건 가수 박완규처럼 실력 있지만 돈 없어 고생한 가수들을 지원하는 ‘태영 기금’이나 ‘티제이 재단’ 같은 걸 이참에 만든다면, 참 박애주의적이겠다는 점.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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