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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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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깨끗하고 건강한 기운만 담아

등록 2007-06-01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은영 대구시 남구 이천동


아기가 뱃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언니로부터 많은 상자를 받았다. 큰조카가 아홉 살이니 9년 전 첫째언니의 첫째아들이 태어날 무렵에 준비했던 출산 준비물이 조카 넷을 거쳐 우리 집으로 건너왔다. 상자 안에는 산부인과 병원과 분유회사 상호가 인쇄된 배냇저고리와 고무줄이 늘어난 내복 아랫도리, 너무 삶아서 무늬를 알 수 없는 내복 윗도리까지 그리고 우리 조카들이 수없이 빨았을 치발기와 딸랑이, 장난감들이 들어 있었다.

뱃속의 아기가 태어나 5개월이 지난 지금 점점 개봉한 상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보행기가 나오고 조그마한 모기장과 딸랑이들이 나왔다. 난 상자를 열고 우리 아들에게 조카들이 입던 옷을 입히고 장난감을 쥐어줄 때마다 건강하게 자란 우리 조카들의 기운까지 입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자녀계획이 하나뿐인 나에게 직장 동료들은 출산준비물을 새것으로 사라고 권유하고, 보다 못한 동료는 속싸개와 배냇저고리를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돌 이후에 입을 옷들로 바꾸었다. 왠지 언니들이 물려준 조카들의 옷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배냇저고리와 작은 사이즈의 내복들은 다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언니들이 그러했듯이 내가 선물받아 입힌 새 옷들도 들었다.

깨끗하게 삶아 곱게 접어서 넣었는데 이것을 누구에게 줄까 생각하니 왠지 낡은 것이라 받는 사람이 기분 나빠할 것 같기도 하다. 이래저래 걱정을 하는데 첫째언니가 막내 남동생에게 주면 된다고 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몇 년 안에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면 물려주라고 말이다. 혹시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낡았지만 깨끗하고 건강한 기운이 가득 담긴 이 상자, 미래의 올케가 잘 받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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