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하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새로 산 물건은 며칠 동안 마음에서 떠나지 않지만 어느새 집안의 풍경이 되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세월이 오래되면 풍경이 아닌 군살이 되어 다시 빈자리를 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가 된다. 이사가 잦으면 더욱 그러하다. 몇 박스씩 짐을 처분해야 새집 기분이 난다는 엄마 덕에 깔끔한 우리 집은 오래된 물건이 별로 없다. 오래된 인켈 전축과 재니스 조플린의 LP판을 사수할 만한 권력이 내겐 없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오래된 물건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수필’이라는 제목의 문고판 책이었다(汎友에세이選, 1976년). 볼품없이 작고 누렇게 바랜 책으로 만만한 옆집 친구 같았다. 허리에는 풀색 띠를 두르고 표지에 예스럽게 그린 제비꽃의 삽화가 박혀 있다. 수작업을 한 듯 꾸밈이 없지만 단정한 배치에 느껴지는 정성. 뒤표지에는 ‘값 280원’이 뚜렷하게 박혀 있다. 그런 생김생김이 좋았다. 컵받침으로도 쓰고 뒤뚱거리는 책상다리에 끼워놓은 적도 있었다. 위인전이나 세계 어린이 명작이 알록달록한 삽화만큼이나 그 교훈마저 별사탕의 달콤함 이상이 아니었던 그때, 왜소한 이 책에 눈길이 쏠렸다. 세로로 쓰인 글씨가 읽기 쉬운 건 아니었지만 한자도 거의 없고 중간중간 맺힌 큰 제목들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피천득 수필 ‘오월’ 중) 뭐든지 백지처럼 그대로 흡수하던 그 시절, 이 문장 하나가 나에게는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청신한 얼굴 그 자체였다. 피천득 선생님은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라 했다. 뭐든지 서투르고 혼란스러운 나이, 사춘기라고 부르기도 일렀던 그 시절에 이 작은 책과 나는 같이 산책을 했고 모호한 부분은 모호한 채로, 두고두고 읽으며 작은 행복을 누렸다.
최근에 서점에서 양장본으로 된 이 책을 보았다. 깔끔한 편집과 감촉 좋은 종이가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오래된 물건은 각각의 이야기와 손때를 간직하지만 어쩔 때는 궁상맞고 싫증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내 변덕과 함께 일상의 풍경을 만든다. 나이 서른이 된 이 책은 나의 친구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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