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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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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할머니의 세숫대야

등록 2005-04-14 00:00 수정 2020-05-03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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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신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줄곧 할머니랑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그런데 몇번의 이사를 할 때마다 우리 할머니가 꼭 챙기시는 물건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세숫대야다. 완벽한(?) 스테인리스인 탓에 욕실 타일과 부딪칠 때마다 마찰음이 나고, 이 날카롭고 기이한 소리는 매일 아침 내 잠을 깨운다. 할머니께서는 “이 대야는 요즘엔 돈 주고도 못 사는 좋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솔직히 난 예쁘고 가벼운 플라스틱 세숫대야가 훨씬 좋다.

할머니는 이 세숫대야로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하신다. 세탁기 사용법을 모르시기 때문에 그렇다. 손빨래로 해야 잘 빨린다고 하신다. 세숫대야는 종종 빨래 삶기에도 동원된다.

사실, 할머니 말고는 식구 가운데엔 세숫대야를 사용하는 사람도 없고, 별 신경도 쓰지 않기에 내겐 그저 욕실 구석에 딱 세워져 있는 욕실 장식품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욕실의 전등이 고장나서 거실 불빛에 의지해 세수를 하게 됐는데, 갑자기 세워진 대야에 숨겨져 있던 그림이 보였다. 바로 무궁화였다.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마모된 탓인지 환한 불빛 아래 숨겨졌던 꽃이 어두운 조명을 받아 드러났다. 기분이 참 묘했다. 요즘 대야에 무궁화를 찍어서 판다면 살 사람이 있을까. 이리저리 살펴보니 테두리에 꼼꼼하게 새겨진 문양도 발견됐다.

그때 무궁화를 발견하고 난 뒤론 재미 삼아 자주 이 대야로 세수를 한다. 여전히 마찰음은 귀에 거슬리지만 세수할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이 든다. 왜 대야에 이런 무궁화를 넣었을까, 옛날 대야에는 다 이런 문양을 새겼을까, 신기하다, 참 섬세하다라고.

박정민/ 대구시 달서구 감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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