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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캠페인] 잃어버린 아버지의 주검과 혼백

등록 2007-08-17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아버지가 일본군 병장의 신분으로 전사해 야스쿠니에 합사된 나경림씨의 증언</font>

▣ 도쿄=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나경림(65)씨는 고운 한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랐다. 그의 부친 나영기씨는 1943년 전쟁터에 나가 이듬해 5월30일 뉴기니 우라우에서 숨졌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날 때 그는 태어난 지 48일이 지난 젖먹이였다. 8월4일 밤 9시, 도쿄 오타구민센터에서 열린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전국 교류회’(이하 전교대회) 국제연대문화페스티벌에 참여한 나씨는 울먹이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떠나기 전날, 숨죽여 울었다”

나씨의 아버지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었을까, 자발적인 ‘선택’이었을까. 일본이 조선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동원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상대로 헤어나지 못할 전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조선총독부는 모자란 인적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1938년 2월26일 조선육군지원병령을 공포했고, 그해 4월2일에는 육군병 지원자 훈련 규정과 훈련 생도 채용 규칙을, 다시 두 달쯤 지난 6월12일에는 지금의 태릉 육사 자리에 육군 특별지원병 훈련소를 만들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학 명예교수는 1996년에 펴낸 책 에서 “지원병 제도가 1944년 징병제도로 바뀔 때까지 조선 땅에서는 30만3294명이 지원입대를 희망했고, 실제 입소자는 6400명에 달했다”고 적었다.

나씨의 아버지는 육군 지원병제가 도입된 지 1년이 지난 1939년(쇼와 14년) 후기 지원병으로 훈련소에 입소했다. 1940년 5월4일에는 오사카 부청도 견학했고, 전남 출신자들끼리 모여 사진도 찍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훈련을 마치고 바로 부대에 배치되는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기간에 면 서기 시험에 합격했고, 나씨도 낳았다. 일본 군인이 되기로 자원했던 식민지 조선 청년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는지 추측해볼 방법은 없다.

전쟁은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943년께 나씨의 부친에게도 영장이 날아왔다. 나씨는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 손톱과 발톱을 잘라 하얀 보자기에 담으며 울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전쟁에 나간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리지 말라는 명령이 있어 제대로 전송도 못했답니다. 가족들은 방 안에 모여 숨죽여 울고, 겨우 큰어머니께서 동구 밖까지 배웅에 나갔다고 합니다.”

떠난 부친은 이후 한 번도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남겨진 사람들은 고통을 받았다. 나씨의 할머니는 아들이 떠난 지 한 달 만에 숨졌고, 할아버지는 몇 년 못 가 반신불수가 됐다. 남겨진 세 모녀의 고난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땅을 여섯 마지기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세 마지기를 친척들이 떼어갔죠.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나씨에게 부친의 사망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는 “시집간 뒤 남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소식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나카무라 가즈나리 일본 후생성 원호국장이 1971년 9월27일 발행한 ‘사망증명서’를 보면 그의 부친은 1944년 5월30일, 동부 뉴기니 우라우 제20사단 제1야전병원에서 ‘육군 병장’의 신분으로 전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사망 15년 뒤 신사에 합사

나영기씨는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본의 신으로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져 있다. 그가 신사에 합사된 것은 숨진 지 15년이 흐른 1959년 4월29일이었다. “그해는 일찍 저 세상으로 간 언니가 숨진 해입니다.” 나씨는 1997년 10월께 일본 정부에 부친의 유해 행방을 물었지만 “동부 뉴기니는 너무 오지여서 유해를 찾을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말했다. 올해 여든아홉 된 나씨의 모친은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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