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프리유어북] 왜 남의 책을 건드리냐고?

등록 2004-04-14 00:00 수정 2020-05-03 04:23

[과 함께하는 ‘프리유어북’]

김용만 · 유재석씨 기증 도서 방류하던 날… 가슴 졸이고 기다려도 새 주인 만나기 쉽지 않아

글 · 사진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김용만·유재석씨가 내놓은 책( 504호)을 방생하기로 했던 4월8일, 벚꽃이 만발한 여의도공원에 갔다. 자칫하면 깜박 잊을 뻔했다. 먼저 프리유어북 사이트(www.freeyourbook.com)에서 등록을 해야지! 이 넓고 거친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쫙쫙 뻗치길 바라며, 안쪽 표지에 고유번호(FYB NO.)를 꾹꾹 눌러썼다. 여행 준비는 끝!

새 주인은 인천의 최영희씨

를 놓을 자리를 물색했다. 외진 곳은 아니나 약간은 한적한, 연못앞 벤치를 발견.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책을 살짝 내려놓고 돌아서려다, 멈췄다. 본래 취지대로라면 책을 놓은 다음엔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게 맞지만, 책이 도중에 사라질까 염려됐다. 벤치 뒤쪽 5m쯤 떨어진 풀밭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망을 보기 시작했다. 오후 2시. 지나가던 사람들은 무슨 책이 놓여 있나 허리를 숙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책을 피해 옆 벤치에 앉았다. 갓난아기를 안은 한 젊은 여자가 앉았다. 그는 남의 책엔 일절 관심 없다는 듯, 혹은 관심을 두면 안 된다는 듯, 앞만 보다 일어섰다. 4살쯤 된 꼬마가 책을 보고 달려와 펴들었다. 곧 그 아이의 엄마는 책을 뺏어 다시 의자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 할머니 한분도 책을 집긴 했다. 인터넷과는 영 멀어보여 조마조마했는데, 동행한 아들이 남의 책을 왜 건드리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럭저럭 1시간이 흘렀다. 이번엔 중년의 남녀가 앉더니,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30여분이 속절없이 흐르는 동안 책은 아주머니의 궁둥이 밑에서 숨도 못 쉬고 있다. 3시30분, 지나가던 중년 아저씨가 책을 펴들었다. 뭐가 묻어 있는지 확인한 거였나 보다. 곧 책을 베개 삼아 벤치에 벌렁 누웠으니. 뒤따라오던 아주머니가 책을 뺏어들더니,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누가 일부러 내놓은 거 같아.” 그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갔다. 그리고 30초 뒤,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 정신없이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까지 ‘프리유어북 사이트’에 등록된 책은 275권, 하지만 발견된 책은 2권에 불과하다. 내놓는 사람의 정성에 비해 발견한 사람들이 성의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 운동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난 믿고 있다. 저분도 그냥 집에 매장시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도무지 그냥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인천시 청천동에 사는 최영희(41·자영업)씨는, 숨을 헐떡이며 느닷없이 말을 건 낯선 여자 때문에 처음엔 놀랐지만 취지를 설명하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불편한 모친과 벚꽃놀이를 하러 여의도에 온 최씨는 딸에게 책을 주고 인터넷에 접속해 책을 등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 책을 지은 사람은 평생을 침팬지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연구해온 동물학자인데…” 책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자 최씨는 TV에서 제인 구달을 봤다며 직접 읽어보겠다며 웃었다.

1시간 반 흘렀지만… 혜화역 작전 실패

다음 행선지는 유재석씨가 부탁했던 혜화역. 을 놓기에는 아무래도 역 플랫폼은 적절치 않은 듯해서 마로니에공원으로 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벤치에 살짝 을 놓곤 10분 뒤에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애들도, 할아버지도, 아주머니도, 아무도 책을 펴보지 않았다. 어느덧 1시간30분이 흘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 복장을 한 사람이 십자가 행진을 시작하자,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이대로 가다간 저 책은 오늘밤 노숙을 하게 될 듯하다. 이쯤 되면 할 수 없다.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음번에 꼭 새 주인을 찾아주자, 기약하면서. 그리고 독자들께 꼭 이 말을 전하겠다, 다짐하면서. “책을 돌같이 보지 마세요. 주인 없는 책을 만나면 펼쳐보세요. 프리유어북이 내게 준 행운이 아닐까 기대해보세요.”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