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위한 ‘합의’는 없었다. 노동시장 개편 압박에 ‘청년’을 동원한 정부·여당의 레토릭이 방향을 바꿔 청년들의 시린 가슴으로 날 세워 날아들고 있다. 미래 세대는 다시 이용당했다.
지난 9월13일 논란과 진통 끝에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합의문’을 발표했다. 합의 과정에서 부딪친 ‘양극의 언어들’이 합의의 정체를 두고도 서로를 향해 기관차처럼 돌진하고 있다. ‘개혁’과 ‘개선’이란 정부·여당·재계의 호명과 ‘개악’이란 노동계의 규정이 양립 불가능한 이해관계의 간극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재계가 노동계를 압박하기 위해 선택한 ‘언어 정치’는 ‘분리 전략’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란 말로 대표된다. ‘기성 노동자들’을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 앞에 세워 ‘기득권층’으로 몰아갔다. 합의문을 보면 ‘청년’은 동원되고 활용됐을 뿐이란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뚜껑 안에서 끄집어낸 합의문의 알맹이에 청년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가 청년들의 암울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합의문은 “근로계약 해지 등의 기준과 절차 명확화”를 명시했다. “임금피크제 도입을 비롯한 임금체계 개편과 관련해 단체협약 및 취업규칙 개정을 위한 요건과 절차 명확화”도 넣었다. 노동시장 구조 개편 과정에서 노동계가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사항들이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으며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는 문장이 덧붙여졌으나, ‘협의’는 ‘합의’를 전제하지 않는다.
노동자 해고의 새 길이 뚫리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23조와 제24조는 ‘정당한 이유 있는 해고’와 ‘긴박한 경영상 필요에 따른 해고’만 허용하고 있다. 일반해고가 가능해지면 ‘쉬운 해고’의 문이 열릴 것이란 우려가 노동계에 팽배해 있다. 논의 과정에서 정부와 사용자는 일반해고 대상자로 ‘저성과자’나 ‘업무부진자’를 거론했었다. 근로기준법의 기본 취지는 ‘해고의 제한’이다. 일반해고 도입은 근로기준법에 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다. 지진이 만든 절벽 아래에서 ‘고삐 풀린 해고’가 고개를 쳐들고 노동자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는 임금피크제를 빌미로 풀밭에 방사됐다. 취업규칙은 사업장 규율과 임금·노동시간 등 노동조건을 사용자가 규정한 규칙이다.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취업규칙을 바꿀 때에도 ‘사회 통념상 합리성 여부에 따라’ 노동자의 동의 없이 가능하다고 정부는 밝히고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제94조)은 취업규칙의 불리한 변경 때는 노조나 노동자(노조 미조직 사업장)의 과반수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는 비정규직·무노조·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최우선으로 공격할 것으로 보인다. 노조와 단체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뱀처럼 기어오는 고용불안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전체 노동자의 90%(국내 노조 조직률은 10.3%)가 해당된다. 취업규칙의 불리한 변경에 제동을 걸지 못한 채 해고로 귀결된 사례가 노동현장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다.
‘청년들의 비정규직화’와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을 강요하는 법제화의 물꼬도 트였다.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방안이 뼈대다. 이 내용을 핵심으로 합의문 의결 하루 만(9월16일)에 새누리당은 ‘노동시장 선진화 법안’을 당론 발의했다. 파견 직종을 전면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새누리당은 합의문에 명시된 ‘충분한 협의’도 없이 “정기국회 통과”를 외치며 입법의 출발선을 뛰쳐나갔다. 노·사·정 합의가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여당이 입증한 셈이다.
청년고용은 기업의 선의에 맡겨졌다. 청년을 앞세워 치른 여론전답게 청년고용 활성화 방안은 노사정위 합의안 맨 앞에 앉았다. 전진 배치에 무색한 내용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유연화를 수단 삼아 달성하겠다던 청년고용을 정부는 재계의 ‘노력’과 ‘자율’에 맡겼다. 합의문은 “상생고용 생태계를 조성하도록 적극 노력”하고, “고소득 임직원은 자율적으로 임금 인상을 자제해 청년고용을 확대하도록 노력”한다고 적었다. 청년고용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엔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나 세무조사 면제 우대, 공공조달계약 가점 부여 등의 지원책을 제시했다. “기업의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긴다”는 반발이 노동계에서 나왔다.
임금피크제로 절감한 돈을 청년고용에 쓰도록 한다는 방침도 실현 가능성을 의심받는다. 노동자 임금을 깎아 만든 재원을 엉뚱한 곳에 쓰지 못하도록 규제하지 않으면 기업이 사내유보금만 쌓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자율 노력 이행률’도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 중 35.8%가 올해 신규 채용을 지난해보다 줄이겠다(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고 밝혔다. 채용을 늘리겠다는 기업은 19.6%(44.6%는 지난해 수준)에 그쳤다. 노동자들이 정부로부터 고용불안을 강제받는 동안 기업은 각종 지원을 얻는 쪽으로 노동시장 구조 개편은 달려가고 있다.
여론전에 끌려들어간 청년들도 거대한 함정에 직면하고 있다. 취업문을 뚫고 노동시장의 일원이 되는 순간 곧바로 이 함정으로 떨어진다. 정부가 청년 세대의 분노를 전용해 달성한 고용의 질 악화는 노동자가 된 청년들을 직선으로 겨냥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일하기 원하는 사람 누구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사회”라는 화려한 수사 뒤에 숨은 칼날이 날카롭다. 1998년 정리해고제·파견법 도입 이후 노동의 바람막이를 제거한 정치가 17년 뒤 평생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는 미래 세대의 삶을 다시 뒤흔들고 있다.
미래 세대 위해? 역겨운 위선이다!9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년희망펀드 조성을 제안하며 1호 펀드로 2천만원을 기부했다. 앞장선 대통령을 따라 정부·여당 관계자들이 뒤를 이었다. 제도와 정책은 노동유연성에 맞춘 뒤 ‘선의’로 청년을 호명하는 모습에 “불우이웃 돕기 하냐”는 청년들의 냉소가 끓었다. 이날 청년·학생들은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밝혔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노·사·정 합의가 청년들의 미래를 들먹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겨운 위선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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