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재벌 개혁과 복지론
안 원장은 대담집에서 경제민주화, 남북관계, 복지정책 등 주요 현안에 대한 견해를 모두 밝혔다. 재벌 개혁과 복지 등 경제민주화에 대한 발언이 단연 눈길을 끈다.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가 “재벌의 횡포를 지적하면서 ‘삼성동물원’ ‘LG동물원’ 등의 비유를 자주 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쓴 것인지요?”라고 묻자 안 원장은 “우리나라에서는 기업들의 창업도 잘 일어나지 않지만, 창업 이후의 성공률이 떨어지는데요, 그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 때문”이라고 답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납품단가를 불공정하게 깎는 등의 횡포를 지적한 것이다. “경쟁 과정에서 공정한 질서가 지켜지고 있나요? 중소기업과 대기업 문제, 골목 상인과 대기업 문제를 보면 답이 뻔하지 않습니까?”라고도 비판했다. 삼성 등 특정 재벌에 대해서도 직설했다. 제 교수가 “(삼성동물원·LG동물원) 동물원 발언은 재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텐데요, 아까 손해도 봤다고 하셨는데 어떤 불이익을 받았나요?”라고 묻자 안 원장은 “꽤 있었죠(웃음)”라고 답했다. 이어 “제가 받은 불이익의 문제도 한 조직에서 리더의 철학이 잘못됐을 때 조직 하부에서 지레짐작 또는 과잉 충성으로 문제를 증폭시킨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안 원장이 최고경영자(CEO) 시절 재벌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을 이유로 안랩과 거래하던 재벌의 어떤 임원이 안 원장과 안랩 쪽에 불이익을 줬다는 뜻이다. 안 원장은 “자기 회사에 노동조합조차 허용하지 않는 기업이 ‘재벌조합’ 격인 전경련에 속해 활동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라며 삼성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비판했다. 삼성전자 백혈병 논란에 대해서도 “기업에서 책임지는 게 맞지 않을까요”라고 밝혔다.
재벌 개혁 해법은 진보 진영과 민주통합당의 대안과 대동소이했다. 안 원장은 재벌 부당 내부거래, 편법 상속·증여, 중소기업 기술 빼가기 등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에서 진행되는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금산분리 강화 등의 입법 논의에 대해서도 찬성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CSR)도 강조했다. 이른바 ‘재벌해체론’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근본적인 접근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고 밝혔다. 책 전체에 걸쳐 재벌 문제를 6차례 이상 언급했다.
복지에 대한 강조도 인상적이다. “정의로운 복지국가 혹은 공정한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표나게 밝혔다. 보수주의자들의 ‘반복지론’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지난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추진한 것에 대해 “말이 안 된다”라는 표현도 썼다. 남유럽 국가들이 복지 지출 때문에 재정위기를 맞았다는 보수파의 단골 주장도 반박했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복지 수준이 더 높은 북유럽 국가들이 먼저 망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 원장은 보편적 복지 확대에 동의했다. 선별적 복지는 부유층과 중산층의 ‘반복지동맹’을 만들 우려가 있고 수혜자를 낙인찍는 부정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밝혔다. 다만, 복지 재정을 고려해 보편적 복지를 제공할 서비스와 선별적 복지 대상을 합리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북정책도 큰 틀에서 민주당 등 야권의 시각과 비슷했다. 안 원장은 통일을 ‘사건으로 보는 시각’과 ‘과정으로 보는 시각’을 대비시키며, 자신은 후자에 서 있다고 밝혔다. 통일은 북한 정권의 붕괴로 어느 날 갑자기 오는 ‘사건’이 아니라, 교류협력의 점진적 ‘과정’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취지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햇볕정책의 성과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6자회담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 전략에도 동의했다. 다만 안 원장은 “남북 협력을 진전시키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과 관련해 필요한 발언은 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는 폐기가 아니라 재협상이 맞다고 밝혔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해 기지 건설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주민 설득 등 과정상의 문제를 지적했다. 쌍용차 파업과 서울 용산 참사에 대해서는 정부와 새누리당의 태도와 대책을 비판했다.
■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 안철수 원장의 정치철학을 지금까지 언론은 이렇게 표현해왔다. 이번 대담집에 드러난 안 원장의 정치적 관점은 예상보다 더 진보에 가까웠다. 거칠게 정리하면, ‘CEO 안철수’와 ‘정치인 안철수’의 생각은 재벌 개혁에서 여전히 같았고 노동문제와 대북문제에서 달랐다.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 소신은 뿌리 깊은 것으로 보인다. 2004년 펴낸 <ceo>에서 안 원장은 ‘벤처산업의 3대 위기’를 거론하며 대기업 시스템 통합(SI) 업체 중심의 소프트웨어 시장구조를 구조적 문제로 거론했다. 안 원장은 “공공 프로젝트를 대기업 SI 업체가 여러 가지 이유로 손실을 감수하고 저가 수주하는 경우에, 그 손실을 하청업체들이 나누어서 분담”한다고 지적했다. 2001년 출간한 <ceo>에도 일화가 소개된다. 국제통화기금(IMF) 환란이 닥친 1998년 안 원장은 자금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정부로부터 15억원의 펀딩을 받았다. 안 원장은 “주주들도 펀딩은 받을 수 있을 때 자금 소요와 관계없이 최대한 받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충고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안 원장은 이에 대해 “시간이 지난후에야 이것이 벤처기업의 논리가 아니라 대기업의 논리이며 소프트웨어 업체의 논리가 아니라 제조업체의 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후회했다.
재벌 개혁 소신은 미국 유학 뒤 더 분명해졌다. 경영학 공부를 마치고 2008년 와 한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자가 “중소·벤처 기업의 어려움이 왜 심화된다고 보나?”라고 묻자 안 원장은 “우선 경영자와 실무자가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 기업을 도와주는 인프라, 정부 제도도 부실하다. 대기업 위주의 산업구조도 문제다. 장기적으론 대기업에도 이런 구조가 좋지 않다. 2천만 명이 (돈을) 벌지 못하면 구매력이 떨어진다”고 답했다. 중산층의 구매력 하락을 우려한 대목은 최근 낸 대담집의 문장과 똑같다. 정부가 대기업·공기업과 중소기업 간 거래 관행, 주식시장 등을 감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원장의 재벌비판론이 CEO 경험을 통해 몸으로 배운 신념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문제에 대한 시각은 변한 것 같다. 과거 저서에는 노동문제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보수적인 발언도 했다. 안 원장은 <ceo>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노동자라는 말이 편안하지 않다. 물론 이 단어에 담겨진 역사적·사회적인 의미와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에서는 상하 간의 계층구분 분리의식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관념이 생겨난 데에는 많이 가진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번 대담집에서는 쌍용차 사태 등을 언급하며 “우리 시대 노동자 서민들의 삶”이라는 표현도 썼다.
대북정책 시각도 넓어졌다. 2001년, 2004년 저서와 1988~2012년 기사를 모두 봐도 안 원장이 북한 문제를 직접 언급한 대목은 찾지 못했다. 2012년 3월엔 탈북자 북송 반대 집회에 참석해 북한 인권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대담집에서 밝힌 대북정책은 큰 틀에서 야권의 시각과 비슷했다.
■ ‘정치인 안철수’의 미래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서문의 첫 문장이다. 2011년 9월2일 서울시장 출마 결심이 임박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뒤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표현한 말이다. 이후 그는 대선 지형에서 변수가 아닌 상수로 여겨졌다. 그리고 2012년 7월19일 ‘기습 출간’된 이 책은 안 원장이 10개월여의 긴 고민을 정리하고 사실상 대선 행보에 나섰음을 보여준다.
안 원장이 대선 출마를 고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4·11 총선에서 “예상치 않은 야권의 패배”였다. “총선 전에는 야권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그렇게 되면 야권의 대선 후보가 제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수순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던 그는 총선 이후 자신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안 원장은 책을 통해 자신의 기반이 야권임을 명확히 드러냈지만, 민주당은 매섭게 비판했다. “총선에서 적극적으로 야당을 편들지 못했던 이유는, 후보 공천이 정당 내부 계파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민주정부 10년’에 대해 ‘실망’ ‘아쉬움’이란 표현을 썼다. “10년간 집권했으면 서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도록 했어야 하는데 어땠습니까? 정부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열심히 했다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안 원장은 앞으로 기자간담회나 인터뷰, 강연 등을 통해 책에서 밝힌 국정철학과 정책구상을 토론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제 생각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을 내놓고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지지를 모은 뒤 그 힘을 바탕으로 출마 여부를 공식화하는 수순을 밟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안 원장은 “기대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아지면, 내가 자격이 없는 것”이라며 불출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인으로서의 자격, 자질에 대한 자신감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간만 본다’는 비판에 대해 “창업자나 경영자는 본질적으로 우유부단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50%가 5%에 양보한 것도 우유부단한 사람의 행보는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정치 경험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선 “낡은 체제와 결별해야 하는 시대에 ‘나쁜 경험’이 없다는 건 오히려 다행”이라며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전·현직 미국 대통령의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내가 정치 변화를 위해 작은 역할이나마 하지 않았을까. 새누리당의 변신, 민주당이 통합으로 거듭난 것도 저를 통해 국민들의 의사가 전달된 것이 조금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말에서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안 원장이 대선 한복판에 들어서면서, 정치권은 크게 요동치게 됐다. 새누리당은 8월20일 대선 후보를 선출하고, 민주당은 8월25일 대선 후보 경선을 시작해 9월23일 후보를 확정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은 안 원장의 책 출간 사흘 전인 7월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 초청 토론회에서 안 원장에 대해 “사실 잘 모르겠다. 뭐를 생각하고 계신지…”라고 말했다. ‘안철수의 생각’에 대해 박 의원이 어떻게 답할지가 관심사인데, 그는 7월20일 “책을 갖고 해석할 수는 없고, 출마를 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국민들께 확실하게 밝히셔야 되겠죠”라며 기자들의 질문을 피해갔다. 민주당은 안 원장과의 야권 단일화 성사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안 원장이 기존 정당들의 정치 일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키울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 |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ceo></ceo></ceo>
한겨레 인기기사
한덕수 권한대행 탄핵정국을 ‘농단’하다
[단독] “국정원, 계엄 한달 전 백령도서 ‘북 오물 풍선’ 수차례 격추”
얼큰하게 취한 용산 결의…‘나라를 절단 내자’ [그림판]
여고생 성탄절 밤 흉기에 찔려 사망…10대 ‘무차별 범행’
[단독] 권성동 “지역구서 고개 숙이지 마…얼굴 두껍게 다니자”
끝이 아니다, ‘한’이 남았다 [그림판]
‘아이유는 간첩’ 극우 유튜버들 12·3 이후 가짜뉴스·음모론 더 기승
받는 사람 : 대통령님♥…성탄카드 500장의 대반전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김예지’들이 온다 [똑똑! 한국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