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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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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보다 평양에서 워싱턴이 가까운 시대

북한은 체제 안정, 미국은 핵외교 성과 원해 핵실험 중단, 식량 지원 합의한 북-미 회담…
인도적 지원 막는 MB 정부 탓에 북-미 교류 활발해져도 남북 관계는 난기류 지속 전망
등록 2012-03-08 17:59 수정 2020-05-03 04:26

‘윤일의 합의’(Leap Day Deal). 미국 국무부는 2월 마지막 날인 29일의 합의를 그렇게 불렀다. 북-미 양국이 중국 베이징 회담의 합의 사항을 각자 발표했다. 힐러리 클린턴 장관은 ‘작은 첫 단계’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진전을 위한 중대한 첫걸음’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6자회담의 문이 드디어 열릴까? 안개는 여전하다. 그러나 풍경의 변화는 시작됐다.

모호하지만, 중대한 첫걸음
양국의 발표문은 합의와 논의의 중간 단계쯤 된다. 각자 형식을 달리해서 발표했기 때문에 표현과 순서의 차이도 있다. 미국은 비핵화 사전 조처를 앞에 내세웠다. 6자회담이 열리기 전에 북한의 성의 있는 조처를 요구해왔고, 발표문에서도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 활동과 핵실험 유예,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를 앞세웠다. 그러나 북한의 발표문에는 미국과 다른 표현이 하나 들어가 있다. 바로 ‘결실 있는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이라는 표현이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핵 활동을 동결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협상이 교착되면? 그것은 알 수 없다. 북한은 미국의 사전 조처를 수용했다. 6자회담 환경 조성 차원에서 일시적 핵 활동의 동결을 양보한 것이다. 북한이 그동안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을 고수해왔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유연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선(先) 비핵화 조처를 북한이 수용했다는 이명박 정부 관계자들의 평가나, 북한이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언론의 해석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동결은 동결일 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핵 폐기 과정을 둘러싼 진짜 협상은 6자회담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실질적인 핵 폐기 과정을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서 추진하겠다는 방침이 변했다고 볼 수 없다.
약속은 정확한 것이 좋다. 이번 합의를 양국은 ‘신뢰 구축 조처’로 부른다. 모호한 약속은 오히려 불신을 증폭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행 순서를 둘러싸고 여전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행 순서를 이제부터 추가 협상을 통해 구체화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정전협정 준수와 관련된 합의도 마찬가지다. 양국 모두 정전협정을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초석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북한 발표문에는 ‘평화협정 체결 전까지’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미국은 북한에 ‘연평도 포격’ 같은 군사적 도발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평화협정의 필요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핵 포기의 대가로 그동안 일관되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요구해왔다. 평화협정은 평화체제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미국이 평화체제에 대한 이행 의지가 있으면, 더 과감한 핵 포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북한의 태도였다.
미국 발표문에 왜 평화협정에 대한 언급이 빠졌을까? 한국 정부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에서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고, 평화협정을 비롯한 평화체제를 만들어가려면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미래지향적 평화전략이 아니라, 냉전시대의 안보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평화체제에 대한 전략과 비전이 없다. 당연히 미국이 이 부분에 대해 협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앞으로 진행될 협상의 어두운 그림자다.

미국도 북한도 안정을 원한다.
양국이 합의한 부분도 있다. 인도적 지원과 사회·문화 교류다. 인도적 지원과 관련해 미국은 24만t의 영양지원을 매월 2만t씩 제공할 예정이다. 쌀이나 밀이 아니라, 고단백 비스킷을 비롯한 가공식품이다. 미국 내에서 직접적인 식량지원이 군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비판적 여론을 고려한 안전장치다. 물론 분배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추가 협상이 필요하다.
또한 미국은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기로 했다. 민간의 인도적 지원을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해 허용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문화·교육·스포츠 분야의 교류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북한 처지에서 얻는 것도 적지 않은 협상이었다.
김정은 체제에서 첫 고위급 회담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새로운 지도부가 협상의 길을 선택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 협상팀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의 ‘뉴라이트’ 관료들과 비슷한 착각이 워싱턴에도 존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에 김정은 체제는 허약하고, 내부의 권력 갈등이 격화될 수 있고, 그래서 대외적으로 강경정책을 구사할 것이라는 사고 말이다. 그러나 김정일 사후의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는 ‘잘못된 이념’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물론 북한이 대미 협상에 적극적인 이유는 안정을 원하기 때문이다. 김정은 체제는 대외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식량지원을 비롯한 경제적 실익도 무시하기 어렵다. 미국이 제공할 24만t의 영양지원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세계식량계획(WFP)은 올해 북한의 식량 부족분을 29만t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의 인도적 지원은 상징적 파급효과가 크다. 미국이 정부 차원의 지원을 개시하고 민간 지원을 허용하면, 당장 이명박 정부가 곤란해진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이른바 ‘5·24 조치’를 통해 정부와 민간의 인도적 지원을 금지하고 있다. 민간의 교류도 막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정치·군사적 상황과 분리해서 추진하겠다고 북쪽과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의 처지에서 난감한 상황이다. 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막을 명분을 상실해버렸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는 지속적으로 미국의 인도적 지원에 부정적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북한은 미국의 인도적 지원을 통해 이명박 정부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왜 북한과의 협상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을까? 올해는 대선의 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핵 없는 세계’라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고 집권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다. 이란 핵 문제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핵 상황이 악화되면, ‘실패한 외교’라는 비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은 협상을 진전시켜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나갈 필요가 생겼다.
더 중요한 것은 이란 핵 문제에 끼칠 영향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이란의 농축우라늄 시설을 군사적으로 타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란 문제가 악화되자 기름값이 뛰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미국에서 유가 상승은 대선 국면에 치명적 악재다. 미국은 이란의 농축우라늄 시설을 핵시설로 볼 수 없다는 정보를 흘려 이스라엘을 말리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남북이 모두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핵 문제의 진전은 이란 문제에 긍정적 효과를 끼칠 수 있다. 농축우라늄 활동을 중단시키고, IAEA가 복귀해서 핵 활동을 감시하고, 그리고 협상 국면을 유지한다면 군사적 공격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말릴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대선 국면에서 시간을 벌고, ‘실패한 외교’의 비판에서 벗어나, 최악의 ‘오일 위기’를 피할 수도 있다.
앞으로 북-미 양국의 분주한 접촉이 지속될 것이다. 리용호 6자회담 대표가 민간 차원(시러큐스대학 초청)이지만 미국을 방문한다. 인도적 지원의 후속 협상을 위해 로버트 킹 북한인권 대사가 베이징에서 북한과 대화할 예정이다. 문화 교류도 활발하게 이뤄질 것이다.
접촉은 최소한 상황 관리에 도움을 준다. 안정적 국면 관리를 원하는 것은 미국과 북한뿐만이 아니다. 올해 가을 새로운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는 중국 역시 한반도의 안정을 간절히 원한다. 북-미 협상이 진전되도록 중국은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유지만으로 현상이 유지되지 않는다. 북핵 협상에서 중요한 쟁점들에 대한 진전이 필요하다. 미국은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제재 완화 조처를 통해 상황을 관리하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해 한-미 양국의 일치된 공감대가 중요하다. 그래야 단순히 동결이 아닌, 실질적 핵 폐기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협상은 상호관계다. 상대의 양보를 얻으려면 자신도 양보해야 한다. 북한이 약속을 지킬 것을 기다릴 게 아니라, 미국 역시 협상에서 적극성을 발휘해야 한다.
북-미 관계가 진전되면 남북관계도 풀릴까? 긍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제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서 저절로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는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데서 중요한 착각이 있다. 북한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남북 모두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대화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다. 민간 교류를 막고 있고, 민간의 인도적 지원도 불허하고 있다. 경제협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산가족의 예를 들어보자. 대한적십자사가 이산가족 교류를 제안했다. 이산가족의 상봉 장소는 금강산이다. 북한은 금강산관광 재개를 이산가족 교류와 연계해왔다.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의지 없이 이산가족 교류를 제안해봤자 소용없음을 정부도 알 것이다. 이렇게 결과가 예상되는데도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대화 의지가 있는데, 결국 북한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제안을 접수조차 거부했다.

재미동포가 부러운 시대로 퇴행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다. 시간도 없다. 북한도 대선까지 기다리겠다는 전략이다. 북-미 관계가 진전된 상황에서 남북 모두 대화 부재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꼴사나운 핑퐁게임이 지속될 것이다. 미국 역시 자신의 다급한 상황 때문에 이명박 정부와 공동 보조를 취하기 어렵다. 당분간 남북관계 악화와 북-미 관계 활성화가 공존할 것이다. 남-북-미 삼각관계의 악순환이다. 6자회담 전망을 낙관하기 어려운 변수다.
과거 냉전시기, 재미동포들이 남북관계의 중재자로 활약했다. 북한의 가족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도 있다. 재미동포들이 부러운 시대, 오래된 흑백필름을 다시 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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