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 질서 안에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정치 지도자가, 인민의 주권 회복과 이를 위한 체제 개혁을 약속하며, 감성 자극적인 선동 전술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정치운동.”(, 서병훈 지음, 책세상 펴냄)
“정책의 현실성이나 가치판단, 옳고 그름 등 본래의 목적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 행태.”(네이버 백과사전)
“우파 포퓰리즘 추진하겠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의 정의는 대략 이렇다.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정치인 개인의 사적 이해관계를 따르는 것, 즉 ‘표’를 의식해 선심성 공약·정책과 감성적인 말로 사람들을 홀리는 것이 포퓰리즘이라는 것이다. 이 단어는 주로 보수 진영이, 분배 정책이나 복지 확충 대책을 내놓는 진보개혁 진영을 공격하는 데 사용됐다. 실제론 포퓰리즘과 이념은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 세력은 진보개혁 세력이 제시한 정책의 내용과 재원 마련 대책 등을 따져보기 전에,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은 일단 포퓰리즘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데 익숙하다. 최근엔 ‘복지=포퓰리즘’이라고 주장하는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라는 보수단체가 만들어져 무상급식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전선’이 흐트러졌다. 시작은 한나라당이 야당과 한진중공업 청문회에 합의하고, 반값 등록금·감세 철회 등을 논의하면서부터다. 지난 6월 말 재계는 정치권을 향해 잇따라 ‘포퓰리즘 공격’을 퍼부었다. 맞받아친 건 야당만이 아니었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사다리 걷어차기 행태” “재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등 거센 비판이 쏟아져나왔다. 황우여 원내대표가 선출된 뒤 부쩍 ‘민생’을 강조하는 한나라당으로선, 이명박 정부 들어 누구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는 재계로부터 포퓰리즘이라고 낙인찍히는 게 억울할 법도 했다.
사태가 더욱 복잡해진 건 지난 7월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홍준표 대표 때문이다. 홍 대표는 7월6일치 인터뷰에서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우파’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스스로 한나라당 정책에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그는 흥미로운 주장을 덧붙였다. “국가재정을 파탄시키지 않는 친서민적인 인기영합 정책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정치다.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반값 등록금, 서민복지 확대, 전·월세 상한제, 비정규직 대책 등은 모두 헌법적 근거를 두고 있는, 좋은 우파 포퓰리즘이다. 민주당의 ‘무상 시리즈’처럼 국가재정을 파탄시키는, 나쁜 좌파 포퓰리즘과는 다르다.”
홍 대표의 인터뷰는 이날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정몽준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정강정책은 ‘포퓰리즘에 맞서 헌법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이 정강정책을 만든 사람으로서 홍 대표가 이를 잘 수호해주길 부탁한다”고 포문을 열었다(홍 대표는 박근혜 의원이 당대표를 하던 때인 2005년 당 혁신위원장을 맡아 당헌 개정 작업 등을 주도했다). 김무성 전 원내대표가 “모든 것이 입법 취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취지에 입각해 현재의 당헌·당규와 정강정책에 충실해달라”고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경재 의원은 “(홍 대표가) 좋은 포퓰리즘, 나쁜 포퓰리즘을 말해 혼돈스럽다. 우리는 당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친서민 정책을 해왔다”며 “포퓰리즘은 포퓰리즘이고, 친서민 정책은 친서민 정책”이라고 말했다.
총선·대선 앞둔 서민 끌어안기 전략자신에게 화살이 쏟아지자 홍 대표는 “한나라당이 지금 하고 있는 정책은 포퓰리즘은 아니다. 헌법 119조 2항에 따른 서민정책을 강화하다 보니, 언론이 헌법을 잘 모르고 자꾸 ‘좌클릭’이라고 쓰는 것 같다”고 한발 물러섰다. 헌법 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 대표는 ‘우파 포퓰리즘’을 포기한 것일까? 그의 발언을 다시 한번 따져보면,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 인터뷰에서 한 주장엔 ‘한나라당=우파=국가재정을 지키는 친서민’ 대 ‘민주당=좌파=국가재정을 파탄내는 인기영합’이라는 도식이 깔려 있다. 한나라당은 친서민 정책을 추구하지만, 국가재정을 파탄내는 좌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출된 단어가 ‘우파 포퓰리즘’이다. 재정 파탄 주장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다르지 않은 인식이다.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도 그가 부인한 것은 ‘좌클릭’이지, ‘친서민’이 아니다.
7·4 전당대회에서 2위로 당 지도부에 입성한 유승민 최고위원은 ‘좌클릭’마저 인정한다. 7월7일 불교방송 에서 그는 “민생·복지 분야에 있어서는 왼쪽으로 가야 하고, (나) 스스로 왼쪽으로 많이 갔다”고 했다. 하지만 홍 대표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서민정책이 ‘좌파’와 다르다고 강조했다. “인기영합이나 표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공동체가 무너질 위기고, 보수라는 세력이 이를 방치하면 무책임한 좌파한테 세상이 넘어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렇게 변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지난해 지방선거를 휩쓴 무상급식 바람이 사회 전반적인 복지 담론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4·27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한 뒤 반값 등록금 실현, 감세 철회 등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아랫목을 데우면 자연스레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기존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선 성장, 후 분배’ 주장이 더는 먹혀들기 어려워지고, 복지 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총선과 대선이라는 거사를 코앞에 둔 정당이 이런 민심과 동떨어진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이렇게 풀이했다. “한나라당은 투표율이 낮아야 유리하지만,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투표 의향을 갖게 된 사회적 약자가 늘어났다. 앞으로 치러질 선거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이미 투표 시장 안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새로 진입할 사람들이다. 한나라당 쪽에서 보면, 보수층은 이미 동원될 만큼 동원됐으니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책 내용 상충해도 다들 ‘친서민’이런 변신이 그냥 포퓰리즘이든 ‘우파 포퓰리즘’이든, 문제는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감세 철회라는 표현만 보면 한나라당이 전면적으로 태도를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새 지도부 가운데서도 유승민·남경필 최고위원은 소득세·법인세 감세를 모두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홍 대표와 나경원·원희룡 최고위원은 그렇지 않다. 홍 대표는 다른 감세는 반대하지만 법인세 가운데 중소기업 감세는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경원·원희룡 최고위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법인세 감세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이 감세를 철회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논의 결과에 따라선 ‘무늬만 감세 철회’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도 마찬가지다. 홍 대표와 나경원·원희룡 최고위원은 사학 구조조정이 선행된 뒤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등록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황우여 원내대표와 신주류가 그간 내세운 ‘먼저 세금을 투입해 등록금을 낮춘 뒤 대학 구조조정을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과 충돌한다. 전면 무상급식에 유승민·남경필 최고위원은 찬성하지만, 홍 대표 등은 부정적이다. 더구나 홍 대표 등은 서울시의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당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도 찬성한다. 논리적으로, ‘친서민’이라면 이들 정책에 반대하기는 쉽지 않다. 사안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 건 있을 수 있지만, 이들 모두가 ‘친서민 포장지’를 두르는 것은 어색하다.
한나라당이 친서민·복지 정책을 꺼내들면서도 굳이 ‘좌파’ 또는 ‘좌파 포퓰리즘’과 다르다고 강조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한나라당이 좌파의 전통적 의제인 서민·복지를 이념에서 분리해 자신의 스펙트럼 안으로 흡수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다.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후보는 ‘실용주의’와 ‘국민성공시대’를 내세워 양극화, 빈곤, 고용불안 같은 진보 진영의 이슈를 빨아들였다. 이 정부가 2009년 중반 새로 선보인 ‘친서민 중도실용’이라는 국정 기조는, ‘반이명박 전선’을 형성한 야당을 ‘이념 세력’으로 만들고 여권을 ‘민생 세력’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이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이겼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급락한 자신의 지지율을 반등시켰다.
이런 현상은 서민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한나라당이 정서적으로 호소한 결과다. 진보·개혁 정당이 이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 탓도 있다. 박상훈 대표는 “시민을 정서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적 현상이다.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이들을 끌어들인 당에서) 이념적·계층적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약속한 정책을 책임 있게 추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 자민당의 ‘55년 체제’(1955~93년 자민당의 단독 장기 지배 체제)가 가능했던 건 지배정당 내부에서 좌우 구도를 형성할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어 사회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한나라당의 정서적 동원이 계속돼, 서민이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보수 정권의 집권이 오래갈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거짓 명제를 바탕으로 시민 기만”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대중의 ‘정열’에 호소하고, 대중에게 집단적 정체성을 제공한다. 물론 이들이 희망이라고 포장한 것은 거짓 명제와 부당한 배제 정치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러나 대중의 입장에서는 달리 정치적 정열을 분출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거절하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온다. (중략) 포퓰리즘 ‘경계령’을 발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경계령을 발동해야 할 때일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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