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 후보 지지한다는 자주파의 ‘21일 결정’… 정파는 아직도 당원의 유일한 선택 기준인가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인천 연합, 경기 동부, 울산 연합 등 자주파(NL) 대표자 모임에서 후보님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던데?”
“글쎄…. 권영길은 권영길이다. 거기에 대해선 언급할 수도 없는 거고….”
“노회찬과 심상정 두 후보는 자주파의 결정이 선거에 나쁜 영향을 미칠 거라고 우려하던데?”
“글쎄…. 자주와 평등은 민주노동당의 기조로 설정돼 있고, 나는 그 속에서 통합의 길로 살아왔다. 그 외에 더 코멘트(언급)할 건 없다.”
“우리 정파가 아니어서 안 된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전화선의 거리만큼이나 긴 침묵이 흘렀다. 기자의 의문은 권영길 후보에게 불편한 질문인 듯싶었다. 기자 개인의 궁금증은 아니다. 당내 최대 정파인 자주파의 핵심 인물들이 지난 7월21일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진행된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서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후 당 내부를 중심으로 의문과 이해, 우려와 안도, 반발과 지지가 혼재돼 나타났다. 자주파의 결정을 이해하고 안도하고 지지하는 세력들은 정파적 이해를 같이하거나 권영길을 지지하는 그룹이다. 선거 국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어서 “예상했던 일”이라고는 하나, 선거를 코앞에 두고 민주노동당에 등장한 경선의 가장 큰 변수는 역시 ‘정파’ 문제임을 다시 확인한 순간이었다.
자주파의 결정에 의문을 품고, 우려와 반발을 하는 당내 정치 세력들은 목소리를 키우고 있지만, 왠지 이해와 안도, 지지하는 쪽은 외부의 시선을 조심스럽고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심상정 후보는 예상했던지, 아니면 한번 막아보려고 했던지 일찍부터 꾸준히 특정 정파의 특정 후보 지지 가능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그의 말은 듣는 이가 서 있는 지점에 따라 동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창당 이래 많은 선거에서 그의 말이 분명히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만은 어느 쪽도 부정할 수 없다. 심 후보는 자주파의 결정이 나온 이튿날 서울 연설회에서, 자신도 정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고백과 함께 말을 꺼냈다.
“수백 년 전에 이 땅에 권문세가의 가문정치, 세도정치가 활개를 친 적이 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문중회의를 열고, 가문의 대표를 뽑고, 정치를 주물렀다. 당직 선거, 공직 선거, 대통령 선거까지 오직 우리 가문이 아니면 안 된다면, 또 이명박, 박근혜에 맞서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후보가 있음에도 우리 정파가 아니어서 안 된다면, 조선시대 권문세가의 가문 정치와 21세기 이 대한민국 진보정치의 정파주의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냐?”
대북 정책, 실제에선 별 차이 없는데…
그의 말엔 다소 비유의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21일 결정’에 대한 피해 의식과 문제 의식을 지닌 당 안팎 인사들의 정서를 날것으로 보여줬다. 노회찬 후보는 세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심 후보와 같은 연설회에서 “이번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는 서울시에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경기도에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정파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노조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10만 평당원이 결정한다. 그렇지 않나?”라고 당원들에게 물었다. 노 후보 쪽 선거대책위원장인 김혜경 전 당대표는 7월23일 “정파는 아직도 민주노동당의 유일한 정치적 선택 기준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민주노동당(당원)은 누가 당의 철학과 노선을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고 당의 현재를 위해서, 당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경륜인지, 대중성인지, 패기인지 토론해야 한다. 정파의 눈으로 볼 것인지, 국민의 눈으로 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김혜경 전 당대표의 말처럼 ‘정파의 눈’과 ‘국민의 눈’이 늘 모순된 건 아니다. 당내 정파 조직의 존재와 활동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소수 정파든 다수 정파든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은 그 연장선상에서 세 후보 캠프에 물었다. “특정 정파가 특정 후보 지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나?” 셋 다 “그렇다”고 답했다. 말할 것도 없이, 결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주체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이건 일반론적인 물음과 답이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민주노동당이 그동안 논평과 성명 등을 통해 수없이 비판해왔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등 기성 정당의 선거철 ‘줄서기’나 ‘줄세우기’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에 궁색해진다.
노회찬 심상정, 두 캠프는 모두 결론이 아닌 과정, 즉 결정 방식을 문제 삼았다. 후보들의 공약과 노선을 걸어놓고 밑에서부터 토론과 합의를 거쳐 도출된 결론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노회찬 캠프의 한 인사는 “어떤 판단 기준과 과정을 거쳐 결정됐는지 투명하지 않다”며 “정파 회원들한테도 결정의 근거를 알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비판과 물음에 자주파는 이렇게 답했다.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자주파 소속의 한 중앙당 당직자는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핵심 문제인 대북 정책을 봤다”며 “노회찬의 대북 정책은 미국 부시 정부나 참여정부의 속도에 맞춰 너무 느리게 설계됐다. 심상정은 한반도 정세를 보는 눈이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지난해 북핵 실험 뒤 당의 대북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면서 보인 반응은 대북 사업 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정파의 인사라는 인상이 뿌리 깊다”고 말했다. 역시 대북관이 키(열쇠)였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세 후보의 대북 정책에서 차이점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실제 정책엔 큰 차이가 없다.
뜻밖에도 권영길 캠프의 한 인사는 자주파의 결정을 그들의 자발적 선택이라고 옹호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비판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원래 다수는 대중조직에서든 정치조직에서든 무한 책임을 지게 돼 있다. 당내 최대 정파로서 합리적이고 신중한 활동 방식의 의무가 있는데, 자주파가 그런 면에서 신중한 검토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제스처’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다. 권영길 후보는 최근 정파 후보 탄생에 대한 우려를 한 번도 표시한 적이 없었다.
잠재적 지지층과 거리감 키워
자주파 일부는 자신들의 결정을 ‘정파의 후보 세우기’로 몰아가는 것에 불편한 기색이다. 이용대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은 “자주파의 결정을 너무 크게 보면서 그걸 강조하는 것 자체가 선거를 정파구조로 몰아가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주파의 결정은 선거에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애초 의도했던 것과 달리 반발 심리를 자극해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반대로 ‘권영길 대세론’을 굳혀 결선 투표까지 가지 않고, 1차 투표에서 결판날 수 있다. 아예 별 영향이 없을 수도 있다. 김선동 당 사무총장은 “나머지 당원들한테 강제할 수단이 없다. 줄세우기를 해도 당원들은 줄을 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한 건 정파 후보 논란은 당내 소모전이라는 점이다. 현재 당과 정파 밖에서 당을 지지하거나 잠재적 지지층이 될 수 있는 일반 국민들과의 거리감을 키울 수 있다. 모든 정당이 마찬가지지만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로 누굴 뽑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뽑냐도 중요한 과제다.
민주노동당은 7월26일 중앙당을 대선 준비 체제로 전환시킨 대선준비위를 가동시켰다. 8월20일부터 전국을 돌며 대선 후보 선출 대회를 연다. 셋 중 누가 후보가 될지,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손에 달렸다. 그러곤 12월19일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계엄 모의’ 무속인 노상원 점집…소주 더미에 술 절은 쓰레기봉투
커피 애호가 몸엔 이 박테리아 8배 많아…카페인 때문은 아니다
한덕수 권한을 국힘 입맛대로…“거부권 가능, 재판관은 불가”
‘일단’ 원톱 굳힌 이재명…국힘서도 외면당한 한동훈
[단독] ‘명태균 폰’ 저장 번호 9만개…김건희·홍준표와 소통도 확인
“닥쳐라” 김용원이 또…기자 퇴장시킨 뒤 인권위원에 막말
공조본, 윤석열 25일 출석 불응 시 체포영장 검토
‘내부자들’ 조승우 시골집 ‘새한서점’ 전소…책 7만권 모두 불타
헌재 서류 닷새째 안 받는 윤석열…재판부, 23일 다음 절차 간다
민주당, ‘명태균 국정개입 의혹’ 윤석열·김건희 경찰 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