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정치권에는 학벌문화의 뿌리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것 이상으로 뿌리가 깊은 편이다. 정치에 자신을 좀더 멋지게 포장해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내야 하는 속성이 담긴 탓이다.
이런 까닭에 정치인들은 명예 박사학위, 최고경영자 과정 이수 따위의 ‘치장 성격’이 담긴 이력을 다듬는 데 적잖이 관심을 쏟아왔다. 이런 가운데 명예 학위에 얽힌 전·현직 대통령의 다양한 취향을 되짚어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은 9월22일 러시아 방문 일정의 하나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대학의 명예 박사학위는 러시아를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에게 으레 수여하는 외교적 관례라고 한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도 재임 중 러시아 방문길에 이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번에 생애 처음으로 명예 학위를 받았다는 점이 주목을 끌었다. 그는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판사·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따위의 ‘상류층 이력’을 밟아오면서도 명예 학위, 최고경영자 과정 같은 ‘부족한 학벌 보완용’ 성격의 행보를 일절 하지 않았다. 한 측근은 “1988년 초선 국회의원이 된 이래 주변에서 명예 학위 등을 받아보자는 건의를 수없이 했다”며 “그때마다 노 대통령은 ‘그런 게 왜 필요하냐’며 물리쳤다”고 말했다.
측근들은 노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하면서 학벌 콤플렉스를 누구보다 많이 느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상고면 어때?’ ‘나는 그냥 생긴 대로 살겠어’라는 식의 나름의 고집을 부려왔다. 이렇게 살아오다 이번에 첫 명예 학위를 그가 받게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의 학위 수여식은 검은 모자와 가운을 걸치지 않고 평복 차림으로 진행된 점도 흥미로웠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같은 대학에서 검은 가운을 입고 행사를 치렀던 예와 다른 탓이다.
외교 소식통들은 이와 관련해 “모스크바대학에는 원래 학위를 수여할 때 검은 모자와 가운을 입는 관례가 없다”며 “전직 대통령들은 모자와 가운을 한국에서 미리 맞춰 준비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번 방러 일정 협의 과정에서도 모스크바대학쪽은 이런 전례를 들면서 “필요하다면 가운을 준비해오시든지…”라고 했다. 그러나 ‘노무현 청와대’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명예 박사학위는 받되, 나름의 ‘노무현 방식’을 그런대로 고집한 셈이다.
역시 상업고등학교 출신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는 정반대로 외국 대학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제 인권운동 지도자로서의 명망과 해외 망명생활 등의 이력 때문에 외국 대학에 지면이 넓다는 인연도 이에 한몫했다고 한다. 2001년에는 대선 낙선 뒤 머물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찾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청와대 관저의 긴 복도 벽에 몇십건의 명예 박사학위증과 수여식 사진들을 죽 걸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물건들을 보기 좋게 배열하려고 ‘전시효과의 최고봉’이라 할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출장 가서 작업을 진두지휘했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그가 명예 박사학위를 실제로 명예롭게 여기며 흡족해했던 것으로 여길 만한 대목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것을 비롯해 재임 중 모두 7차례의 외국 유명대학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 졸업자여서 학벌 콤플렉스 여지는 적었겠지만, 명예 학위를 즐기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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