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스마트 기기 홍수 속에서도, 빛바랜 아날로그 기기의 매력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복고 취향이 유지될 수 있는 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십 년 전에 생산한 전자기기를 제대로 된 부품 없이도 고쳐내는 ‘수리 장인들’의 마법 덕분이다.
이정순(47·서울 광진구)씨는 요즘 매일 밤 귀와 눈이 호사스럽다. 남편이 세운상가 수리수리협동조합에 맡겨 고친 오래된 라디오 덕분이다. 이 라디오는 2011년 미국에 있을 때 중고생활용품점에서 2.5달러 주고 샀다. 중고상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 고쳐 써야 한다”며 거저 주다시피 했다. 디자인이 맘에 들어, 못 고치면 장식용으로 쓸 요량으로 샀다. 비싼 인건비 탓에 미국에선 수리할 엄두를 못 냈다. 2012년 한국으로 가져와 전파사 여러 곳을 돌며 수리를 맡겼다. 그런데 “전원쯤이야… 간단하다”고 자신했던 수리기사들은 “너무 옛 제품이라 고칠 수 없다” “부품이 없네”라며 번번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올여름, 세운상가 수리수리협동조합 수리기사들이 생명을 불어넣었다. 5만원, 수리비도 착했다.
이민수(60·충북 충주)씨도 충주 큰형님 댁 구석에서 찾은 오래된 붐박스를 들고 세운상가를 찾았다. 대형 카세트라디오는 1980년대 해외 파견 노동자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한 큰형님의 귀국 선물이었다. 1980년 시판된 샤프 GF-9494는 당시 환율로 30만원 정도 하는 고가 물품인데, 특히 형수가 좋아했다. 거칠게 생긴 카세트라디오의 스피커 두 개에서 하루도 멈추지 않고 노래가 흘러나왔을 정도다. 동네 잔칫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했다. 여기저기 긁히고 깨진 세월의 흔적만큼 곳곳에 추억이 깃든 물건이지만, 작동되지 않아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옛 추억을 수리해주는 곳은 세운상가에 있는 수리수리협동조합이다. 서울 종로구 장사동 116-50번지. 세운상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한때 ‘못 고치는 물건이 없다’는 명성을 떨쳤던 곳이다. 2017년 쇠락한 세운상가를 되살리는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하나로 상가의 수리 장인들이 함께 조합을 만들었다.
사진·글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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