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정치질서 뒤흔든 역사 속의 킹메이커… 그들은 우리 역사에 무엇을 남겼나

전통 왕조 시절에 ‘킹메이커’란 말을 쓰면 그 자체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하늘을 대신하는 천자(天子)는 하늘의 질서에 따라 책봉되는 것이지 인신(人臣)이 감히 만들겠다고 나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조 시절의 하늘이란 곧 지금의 국민이다. 나라의 최고지도자는 국민 다수가 선출하는 것이지 몇몇 정객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런 당위성은 항상 현실 정치라는 현실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왕조국가에도 이른바 킹메이커가 존재했던 사례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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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략결혼 바탕 왕위 올라… 다이너스티메이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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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은 고대의 킹메이커였다. 김유신이 킹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이 김춘추인데 김유신은 그를 데리고 집 앞에서 공을 차다가 일부러 옷끈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김유신은 누이동생 문희에게 옷을 꿰매게 했고, 이를 계기로 문희는 임신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문희와의 결혼을 거부했다. 김유신의 가문이 김춘추보다 아래였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었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 부인이었다. 즉 김춘추의 부계와 모계는 모두 신라왕족이었는 데 반해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이지만 갓 진골에 편입된 변방진골에 지나지 않았다.
는 김유신이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하는 틈을 타서 문희를 불태워 죽이는 시늉을 함으로써 여왕을 끌어들여 문희와 결혼에 성공했다고 적고 있다. 김춘추가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이유가 변방진골과의 결혼 때문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가 문희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단순히 선덕여왕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 김유신이 지닌 군사력과 결합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김춘추의 조부 진지왕은 즉위 3년 만에 폐출된 인물로서 김춘추는 김유신의 군사력이 없었다면 왕위에 오르기 어려웠을 인물이다. 결국 김유신은 일정한 하자가 있는 김춘추를 킹으로 만들었으나 김춘추는 에서 ‘왕이 김유신과 함께 신비스런 꾀와 힘을 다해 삼한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고 할 정도로 성공한 임금이었다. 신채호는 김유신을 음모의 정치가라고 혹평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부정적인 후대인의 인식이고 당시 신라의 관점에서는 약소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만든 킹과 킹메이커의 결합이었다.
정도전은 킹메이커의 차원을 넘어 ‘다이너스티메이커’(dynasty maker)라고 할 만한데, 한 임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왕가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의 단순한 권력욕의 소산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확대와 농민생활의 안정이란 시대정신의 구현이라는 점이다. 정도전은 우왕 9년(1383) 자신이 킹의 대상으로 삼은 함흥의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군사를 보고 “이 군사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란 유명한 말을 남긴다. 결국 ‘이 군사’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했고 500년 사직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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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단순한 킹메이커 차원을 넘는 것은 고려 말의 지배계급인 권문세족을 붕괴시키고 신흥사대부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삼은 조선을 개창한 데 있는데, 이는 단순한 지배계급의 교체가 아니라 권문세족이 탈점한 광대한 토지의 몰수와 재분배에 기초한 농민생활의 안정이 병행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에 가깝다. 농민들이 조선 개창과 이성계 즉위를 환영한 것은 이런 조처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킹메이커 한명회

우리 역사상 가장 탁월한 킹메이커였던 한명회가 과거의 단골 낙방생 신분 때 킹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이 수양대군이었다. 친구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선을 대는 데 성공한 그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결국 수양 대군을 킹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가 킹메이커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 권력을 잡기 위해서였다. 한명회는 계유정난 직후 정난(靖難) 1등공신에 책봉된 이래 무려 4번이나 1등공신에 오르는 괴력을 발휘하는데 정난공신을 제외한 나머지 3번은 모두 임금 즉위에 공을 세운 결과, 즉 킹메이커로서 공신이 된 것이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두 딸을 각각 세조(수양 대군)의 아들과 손자에게 주어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는데 사위 예종이 세조 뒤를 이은 임금이 되었다. 예종은 즉위 뒤 14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나 한명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비상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또다른 사위 자을산군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그런데 자을산군은 일찍 죽은 세조의 장남 의경 세자(덕종)의 아들로서 즉위 당시 형 월산군이 살아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왕위 계승 서열로는 월산군이 앞섰으나 월산군에게는 한명회 같은 킹메이커 장인이 없었다.
거듭된 킹메이킹을 통해 한명회를 중심으로 ‘훈구파’(勳舊派)란 정치집단이 형성되는데 이들은 정치권력과 대토지를 독점한 소수 지배계급으로서 임금 이상의 권력을 행사했다. 조선 중기 100년의 역사는 이들 훈구파의 전횡에 맞선 사림파의 도전의 역사이자 수난의 기록이기도 했으니 원칙이 무너진 킹메이킹의 결과는 이처럼 역사의 발전에 많은 저해를 가져왔던 것이다. 사림파의 도전에 대한 훈구파의 공작정치가 바로 사화(士禍)인데 이미 사망한 한명회의 시신이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하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정상적인 사대부 정치체제가 붕괴하고 당쟁이 격화되면서 제 세상을 만난 것은 각 정당의 킹메이커들이었다. 이들은 심지어 임금이나 왕비, 세자에게도 특정 당인(黨人)의 딱지를 붙여 옹립하거나 축출했다. 숙종 때 희빈 장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끝내 사약을 받은 이유는 집권 노론에 의해 남인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노론은 장희빈의 아들까지 제거하고 숙종의 서자 연잉군을 세우려다가 소론의 반발 때문에 실패하고 경종이 즉위한다. 경종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할 수 있었으나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주장 등으로 자신을 무력화하려는 노론과 끊임없이 충돌해야 했다.
노론은 결국 경종을 독살하고 연잉군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영조 4년 발생한 이인좌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 군사들이 곡(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노론의 무리한 킹메이킹에 대한 공개적인 반발이었다. 노론의 무리한 킹메이킹은 끝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등 조선의 정치체제는 극히 혼미한 상태에 빠져든다. 하늘을 대신하는 임금의 즉위에 대한 원칙이 사라진 정치판에는 이해득실만이 횡행했던 것이다.
시대정신 구현해야 정당한 평가 받아
킹메이커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정상적인 정치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것으로서 역사의 비극이다. 조선 후기 킹메이커들이 날뛴 결과 왕가에는 독살과 극단적 정치보복이 잇따랐고 이는 그대로 우리 역사의 부담이 되었다. 조선은 신분제의 해체와 개방이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해야 할 시기에 국왕 즉위를 둘러싼 제로섬 게임에만 몰두하다가 끝내 망국에 이르고 만 것이다.
정도전이 다이너스티메이커로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킹과 함께 당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당인들이나 현재의 자칭 킹메이커들처럼 지역감정이란 집단정신병에 기대 권력의 유지를 노리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현재 킹메이커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시대정신의 구현자로서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종착역에 닿았어야 할 기나긴 정치여정의 마지막을 연장하기 위한 방편일 뿐인지 스스로 가늠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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