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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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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연봉 129억일 때 파산은 오고 있었다

SVB 사태서 2008년 금융위기가 보인다? “국민 세금으로 은행 구제” 비판
금융위기 때 ‘성과급 잔치’ 한 은행…이번에도 경영진은 파산 전 주식 매각
등록 2023-03-24 11:32 수정 2023-03-27 02:11
2023년 3월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 앞에서 보안요원이 고객을 안내하고 있다. REUTERS

2023년 3월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 앞에서 보안요원이 고객을 안내하고 있다. REUTERS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로 전세계 금융시장이 2008년 금융위기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미국 정부가 시장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유동성 위기가 다른 은행으로 번지고 있는데다 은행의 방만한 경영과 정부의 관리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2008년 금융위기 상황과 닮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실리콘밸리은행은 지난 3년간 코로나19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저금리 기조와 미 정부의 확장재정으로 시중에 많이 풀린 돈이 실리콘밸리로 몰려들면서 이 은행은 사업을 키워나갔다. 은행의 모회사인 실리콘밸리은행파이낸셜그룹의 자산은 2020년 858억달러에서 2021년 1660억달러, 2022년 2163억달러로 성장했다. 순이익은 2020년 12억달러에서 2021년 18억달러로 늘었고 2022년에도 15억달러를 벌었다.

코로나19 기간 돈이 풍부해진 벤처기업들은 실리콘밸리은행에 거액을 맡겨뒀는데 늘어난 예금만큼 대출 수요는 늘지 않았다. 주식시장 호황에 기업들이 상장으로 자금을 직접 조달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은행은 다른 수익을 찾아 미 국채를 사들였다. 그룹의 자산 가운데 국채가 포함된 만기보유증권의 비중은 2020년 15%에서 2021년 35%, 2022년 44%로 크게 늘었다. 그룹 최고경영자 그레그 베커는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2020년 750만달러인 연봉(스톡옵션·인센티브 등 포함)을 2021년 992만달러로 올려 받았고, 2022년에도 991만달러(약 129억원)를 받아갔다.

위기가 진행 중일 때 겉으론 양호했던 재무제표

은행이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동안 위기는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2022년 3월부터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공격적으로 금리인상을 했다. 2022년 연 0.25%인 기준금리는 1년 새 4.75%로 4.5%포인트나 올랐다. 주식시장이 침체하고 경기가 위축되자 기업들은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 쓰기 시작했다. 거액의 뭉칫돈이 빠져나가자 은행은 갖고 있던 국채를 팔아서 돈을 돌려줘야 했다. 시장금리가 오르는 사이 국채 가격은 떨어졌다. 실리콘밸리은행은 자금조달을 위해 결국 손해를 보고 국채를 팔아야 했다. 2023년 3월8일(현지시각) 그룹은 “210억달러의 자산을 매각해 18억달러 손실을 봤다”고 공지했다.

은행의 유동성 불안은 삽시간에 예금 인출 행렬(뱅크런)로 이어졌다. 미국은 법적으로 예금 25만달러(약 3억2500만원)까지 보호받는데 이보다 더 많은 돈을 맡긴 기업고객들이 맡긴 돈을 못 찾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3월9일 하루 동안 420억달러 인출 요청이 쇄도하는 등 시장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당국이 개입했다. 3월10일 캘리포니아 금융보호혁신부는 실리콘밸리은행을 폐쇄했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관재인으로 지정했다. 실리콘밸리은행이 촉발한 공포심리는 다른 중소은행들에 번지면서 뉴욕에 본사를 둔 시그니처은행에서도 같은 날 뱅크런이 발생했다.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 연방예금보험공사는 3월12일 공동성명을 내어 시그니처은행 영업정지를 발표하고, 특별 예외 조처로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은행의 예금자들에게는 예금보험이 되지 않는 모든 예금까지 지급 보장하겠다고 했다. 뱅크런이 다른 은행으로 추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였다.

정부의 강력한 조처가 ‘구제금융’이냐 아니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구제금융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부실 은행을 살린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2008년 파생금융상품 부실로 은행들이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 지분을 사들이거나 기업 간 인수·합병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주기도 했다. 대형 보험사인 에이아이지(AIG)가 유동성 위기로 흔들리자 연준이 850억달러를 들여 AIG의 지분 79.9%를 인수하기도 했다.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려는 조처였지만 “국민 세금으로 대기업을 구제해준다”는 거센 비판이 일기도 했다.

미국 정부 “2008년 구제금융과 다르다” 선 긋기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를 겪은 미국 정부는 이런 논란을 의식한 듯 과거 구제금융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3월13일 연설에서 “(지급보증 비용은) 은행이 예금보험기금에 내는 수수료에서 나온다. 납세자에겐 어떤 손실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을 파산시켰고 주주나 투자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2008년 정부 대응과 차별된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구제금융 성격과 유사하다는 시각은 존재한다. 밴더빌트 로스쿨의 은행학 교수인 모건 릭스는 <엔비시>(NBC) 인터뷰에서 “연방예금보험 기금이 손실이 날 경우 그중 일부는 은행 고객에게 간접적으로 전가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다수 일반예금자가 낸 돈으로 일부 기업의 예금을 보호해주는 꼴이 된다는 취지다. 스티븐 켈리 예일대학 금융안정프로그램의 선임연구원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연준은 전체 은행 시스템에서 금리 위험에 대한 보험증서를 썼다. 나는 그것을 ‘시스템의 구제금융’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은행 뱅크런의 큰 불씨는 진화되는가 싶더니 스위스의 대형은행 크레디스위스(CS)가 유동성 위기를 겪어 유비에스(UBS)에 인수되는 등 시장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다른 중소은행들에도 비슷한 위기가 닥칠 경우 예금 전액을 보장할 수 있다는 입장을 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3월21일 미국은행협회 행사 연설에서 “우리의 개입은 더 광범위한 미국 은행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다. 소형 금융기관들이 예금 인출 사태를 겪는다면 비슷한 조치를 취하는 게 타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은 ‘은행에 대한 시장 규율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예금이 빠져나갈 위험이 없다면 은행 경영진이 보수적으로 경영할 장려책이 없다. 고액 예금자들은 현금을 여러 은행에 분산 배치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실리콘밸리은행처럼 고객 혜택을 많이 제공하는 부실 은행에 위험이 집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재준 인하대 글로벌금융학과 교수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예금보험제도는 예금 일부를 보호해주는데 소액투자자를 전액 보호해주되 돈 많은 사람들은 손해 보도록 하는 취지다. 전액 예금 보장은 금융정책자가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장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2023년 3월16일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REUTERS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2023년 3월16일 상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REUTERS

경영진은 파산 전 주식 매각 차익 챙겨

미국 정부는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의 경영진은 해고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룹 최고경영자 그레그 베커는 이미 2월27일 그룹 주식 1만2451주에 대한 스톡옵션(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한 뒤 확보한 주식을 곧바로 매각해 230만달러(약 30억원)의 이익을 챙겼다. 실리콘밸리은행 임직원들 역시 은행 자산이 정부에 압류되기 몇 시간 전 연례 보너스를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바이든 대통령은 3월17일 추가 성명을 내어 “연방예금보험공사가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은행 같은 부실 은행의 경영진으로부터 주식 매각 이익을 포함한 보상을 회수하고 과실을 범한 경영진에게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며 의회에 관련 입법을 촉구했다.

정부 지원을 받은 은행의 도덕적 해이는 2008년에도 벌어졌다. 당시 구제금융을 받았던 AIG가 이듬해 3월 임직원에게 1억6500만달러 보너스를 주자 대중의 분노가 커졌다. 당시 미 하원은 구제금융을 받은 회사의 보너스를 과세 방식으로 환수하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위헌 요소 등을 이유로 우려를 표명하면서 상원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이런 과거 때문에 이번 사태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또다시 ‘대마불사'론이 언급된다. 대마불사(too big to fail)는 ‘큰 기업은 사회경제적으로 너무 중요한 역할을 해서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대형은행이 파산하면 실물경제에 돈이 돌지 않고 기업 도산 등 사회 전반에 위험이 확산하기 때문에 정부가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제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2010년 미국 의회는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금융개혁법인 도드-프랭크법을 통과시켰다. 자산 500억달러가 넘는 은행은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회사'로 분류하고 건전성 규제를 강화하고 연준이 정기적으로 위험 평가를 하는 내용이었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이 기준이 자산규모 2500억달러로 상향되면서 규제 대상이 줄어들었다. 자산 2천억원인 실리콘밸리은행은 자산규모로 미국에서 16번째로 크지만 이 규제를 적용받지 않았다. 실리콘밸리은행은 단기 예금을 받아 장기 채권에 투자하면서 금리인상에 따른 위험 요소를 키웠지만 자체적으로 위험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준이 예금 전액 보호 조처를 한 것은 실리콘밸리은행이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은행이 됐다는 의미다. 그런 부분에서 현행 규제에 허점이 생긴 것이므로 규제 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은행의 위험 추구행위 규제, 경영진 과실 책임 강화해야

한국은 실리콘밸리은행처럼 특정 산업, 특정 분야만을 대상으로 하는 민간은행이 자리잡지 않았다. 벤처기업 대출은 주로 정부 주도의 정책금융으로 이뤄지고 있다. 5대 대형은행이 장악한 과점체제로는 금융산업 혁신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중소 규모의 특화은행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사업모델은 국내에서도 꾸준히 도입을 검토해왔다. 이번 사태가 터지기 불과 석 달 전 금융위원회는 “실리콘밸리은행식 벤처대출을 도입해 혁신기업 성장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은행 산업 혁신을 위한 차원에서 대형은행 중심의 산업구조를 바꿀 필요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은행의 경영 안전성 규제가 소홀해진다는 우려도 있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리콘밸리은행은 자금조달이 단선적이고 자금운용도 특정 영역에 쏠리는 형태로 운영됐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자산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며 포트폴리오의 다양성을 갖도록 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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