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모터스(GM)의 해외사업부문 책임자인 배리 엥글(53) GM 총괄부사장에게 국내 언론들은 ‘밀당 고수’라는 별명을 붙였다. 평창겨울올림픽 열기가 한창인 2월19일 한국을 방문해 정치권과 전북 군산 지역사회를 들쑤셔놓은 그의 노련한 협상술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한국GM의 군산공장 폐쇄 결정 과정에서 엥글 부사장과 GM 본사는 비즈니스 협상의 전형을 보여줬다. 한국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GM은 국내 3개 사업장 가운데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장 정치적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군산공장을 목표로 삼고 한국 정부를 단계적으로 압박했다.
정부, GM 철수 발표에 우왕좌왕엥글 부사장은 지난해 말 첫 방한 때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산업은행(산은) 관계자 등을 비밀리에 만났다. 그는 한국GM 유상증자에 2대주주인 산은이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한국GM에 신차를 배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지속적인 대규모 손실로 자기자본이 완전 잠식된 한국GM을 살리려면 정부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이에 정부는 한국GM의 경영 정상화 방안을 검토한 뒤 지원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원론적 태도로 대응했다.
엥글 부사장의 방한 결과가 신통치 않자 GM의 최고경영자가 측면 지원에 나섰다. 메리 배라 GM 회장은 2월6일(현지시각) 콘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한국GM에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이 철수 가능성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국외 자동차업계가 술렁거렸다. 배라 회장의 지원사격 속에 엥글 부사장은 2월7일 다시 한국에 왔다. 그는 부평공장이 있는 인천을 찾아 유정복 인천시장과 면담했지만, 정부 관계자들과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정부가 한국GM의 자구책 마련이 먼저라는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GM은 압박 강도를 한 단계 더 높였다. 엥글 부사장이 미국으로 돌아간 직후인 2월13일, GM 본사는 군산공장 폐쇄를 전격 발표했다.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던진 것이다. 단계적이면서 기습적인 공격의 효과는 컸다. 한국GM의 철수 가능성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반면 한국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GM은 인원 감축과 임금 삭감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 계획을 잇따라 발표하며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실사한다고 나섰지만…정부와 산은은 ‘선 실사, 후 지원’ 카드로 GM의 공세에 맞서고 있다. 실사를 통해 경영 위기의 원인이 뭔지, 재무구조 개선에 어떤 조처가 필요한지 등을 정확히 파악해야 지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정부는 2월19일 엥글 부사장과 만나 대주주의 책임 있는 역할과 이해관계자(주주·노동조합·채권자 등)의 고통 분담, 지속가능한 경영 정상화 방안 등 3대 원칙을 제시했다.
GM은 이에 대해 두 차종의 신차 한국 배정과 28억달러의 신규 투자 계획을 내놨다. 또 3조원(27억 달러) 규모의 본사 차입금을 출자전환하겠다는 뜻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GM 쪽이 우리가 제시한 원칙을 수용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은 전향적인 태도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실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거라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온다. GM이 선별적으로 제공하는 자료로 과연 경영진의 책임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2월27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GM에 북미 GM의 매출원가율을 적용해보면, 3년간 1조원의 이익을 내는 흑자 기업으로 전환된다. GM 자동차부문 전체의 매출원가율을 적용해봐도 적자 규모가 1천억원대로 크게 감소한다”며 GM 본사의 회계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지 의원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실사는 물론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의 조사와 감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GM이 수만 명의 일자리를 담보로 ‘철수’라는 배수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산은의 실사가 추가 지원을 전제로 한 요식행위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산은이 3월 말까지 실사를 마치기로 했다는데, 이미 (실사가) 정치적 판단이 전제된 선택이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실사와 별개로 GM 본사에 차입금의 출자전환과 함께 차등감자를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주주인 GM이 부실 책임을 가장 많이 져야 한다는 원칙을 관철해야 추가 지원에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차등감자는 경영 부실 책임이 큰 대주주의 지분에 대해서만 차별적으로 감자를 하는 것이다. 이는 2대주주인 산은이 영향력을 행사할 지분을 확보하는 실리를 챙길 수도 있다.
만약 GM 본사가 차등감자 없이 차입금을 출자전환하면 2대주주인 산은의 발언권은 급격히 축소된다. 장부상 한국GM의 자본금은 1660억원인데, 이 가운데 17.2% 지분율을 가진 산은의 출자 규모는 282억원 정도다. 만약 GM이 차입금 3조원을 출자전환하면, 산은의 지분율은 1% 아래로 떨어진다. 한국GM의 정관에 정해진 주총 특별안건 의결 기준 85%를 저지하려면 산은이 최소 15% 이상의 지분율은 확보해야 한다.
‘밀당 고수’를 상대하는 협상은 결코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GM은 이미 오스트레일리아(2013년), 러시아(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인도(2017년) 시장에서 철수 협상을 한 경험이 있다. 각국 정부의 지원을 최대한 받아낸 뒤 지원이 끊기면 가차 없이 철수했다. 언제든 철수할 수 있는 준비를 해놓고도 이를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협상술로 최대한 이익을 챙겼다.
GM이 한국 남을 의지 있는지 확인해야이런 이유로 정부가 GM이 짜놓은 협상의 틀을 깰 수 있는 과감한 조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산은이 GM의 요구대로 증자에 참여하는 대신 한국GM 이사진의 절반 이상을 요구하는 등의 역제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GM이 이를 거부하면 한국에 남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협상이 새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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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