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벌정책 논의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지난 3년간 통 연락이 없던 경제부처 관료들과 보수신문 기자들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경제력 집중의 원인과 대책이 뭐냐?”라는 식의 근원적 질문을 한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필자가 이러한 분위기 반전의 이면에 있는 정치적 맥락을 풀이할 능력은 없으나, 이건희 삼성 회장의 낙제점 발언 이후 레임덕 심화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집권세력의 ‘재벌 때리기’, 또는 4·27 재보선 결과를 보자마자 내년 총선과 대선 이후 대비에 들어간 처세술 달인들의 ‘보험 들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오래간만에 찾아온 호기를 날려버리지 않으려면, 재벌 개혁의 필요성과 그 방법론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낙수효과는 허구다
과거 민주정부 10년간에도 경험했듯이, 재벌 개혁 정책은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후퇴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는 데 필요한 긴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대중의 지지와 인내심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가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관건이 된다.
그 핵심은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 신화를 극복하는 것이다. ‘대기업의 선도적 성장의 과실이 중소기업과 서민으로까지 확산되도록 한다’는 2007년 이명박 후보의 대선 공약집에 있는 슬로건은 21세기 한국 경제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 증명한 사람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래 이 대통령이 모든 사람을 헷갈리게 하며 서민대책,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들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성과를 올리는 것에 천부적 감각을 지닌 이 대통령은 낙수효과에 의존한 경제정책 기조로는 결코 성공한 경제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도 깨달은 진리를 개혁진보 진영이 의심해서야 되겠는가. 이를 구체적 정책대안으로 체계화하며 대중을 설득할 때 재벌 개혁 정책, 나아가 진보적 대안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수많은 조처가 시행됐지만,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밀려 개혁 조처가 후퇴한 탓이 크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접근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의 개혁 조처는 개별 법인, 특히 개별 상장법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재벌의 지배구조 및 승계구도가 총수 일가가 직접 지배하는 비상장 가족기업을 핵심 고리로 해서 짜여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한계가 금방 드러난다. 예컨대 삼성그룹은 ‘이재용 사장 → 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출자고리에서 에버랜드와 삼성생명이라는 비상장 계열사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삼성생명 보험계약자의 권익 침해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지만, 효과적인 규율 수단이 작동할 수 없었다. 지난해 삼성생명이 상장됐고, 에버랜드도 상장 계획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승계구도가 완성된 이후 그 차익을 실현하는 과정일 뿐이다.
대륙법 전통에 선례 있어재벌은 기업집단(Business group)이다. 다수의 계열사가 공통의 지배권하에서 선단식으로 경영되고 있다. 기업집단 체제는 다수 계열사 간의 시너지 효과를 내부화하며 대규모 투자에 따른 위험은 분산하는 등 많은 장점을 가진 기업조직 형태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제법은 기업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별 기업만을 규율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선수는 기업집단인데 심판은 개별 기업만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재벌은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때는 기업집단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때는 개별 기업 차원으로 도피해버리는 모순된 행태를 보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업집단의 권리와 의무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발생하고, 수많은 이해관계자에게 부당한 피해가 발생함에도 이를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법인이 다른 법인의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기업집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다. 따라서 기업집단이 경제활동의 핵심 주체로 등장한 것은 이제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며, 이에 대한 규율 체계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영국 등 보통법 국가들은 개별 기업을 단위로 하는 회사법 체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법원의 판례를 통해 법인격 부인의 법리(Piercing the corporate veil), 이중대표소송 제도(Double derivative suit) 등 예외적이지만 강력한 구제 수단을 발전시켰다. 한편, 독일·이탈리아·포르투갈 등 유럽 대륙국가에서는 아예 성문법을 통해 기업집단 자체를 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예컨대 독일은 콘체른(기업집단) 내의 거래에서 손실을 입은 계열사에 대한 손실보상 조건이 있으면 이른바 부당내부거래에 따른 책임을 묻지 않는다. 또한 공동결정법은 자회사의 노동자가 모회사의 감독이사회에 자신의 대표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개별 법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에 더 적합한 접근 방법이겠는가? 우리나라의 대륙법적 전통, 그리고 사법부의 능력과 관행 등을 고려할 때, 필자는 후자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기업집단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것이다. 즉, 기업집단의 법적 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실질적 의사결정자(총수)와 참모조직(비서실), 그리고 각 계열사 이사회 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여, 기업집단이 강점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불공정 하도급도 동시에 시정필자가 기업집단법적 접근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국·영국 등 이른바 앵글로색슨형 국가에서는 기업(조직)과 시장의 경계선이 비교적 분명하다. 반면에 일본·독일 등 이른바 관계형 경제질서 국가에서는 그 중간 영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하도급거래 관계, 주거래은행 관계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 준내부적 조직(Quasi-internal organization) 관계에서는 거래의 양 당사자가 비록 외형적으로는 별개의 법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직 내부자에 준하는 정도의 장기적 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에 앵글로색슨식 사적 자치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협상력 격차로 인한 불공정거래의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하도급거래 관행, 은행과 차입기업 간의 기회주의적 행동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기업집단법적 접근은 대기업(집단)이 준내부적 조직 관계에 있는 거래 상대방에 대해서도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기업이 중소 하도급업체와의 협력을 통한 성과를 공유(그것이 성과공유 방식이든 초과이익공유 방식이든)함으로써 중소기업의 경영 상황을 개선하고, 나아가 중소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동반성장의 선순환을 이끌어낼 것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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