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종말론’(peak oil)이라는 것이 있다. 미국의 지구물리학자인 매리언 킹 허버트 박사가 1950년대에 내놓은, 일종의 묵시론적 전망이다. 그는 자원 위기는 석유가 고갈되는 시점이 아니라, 석유 생산이 정점을 찍고 감소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시점을 1960년대 후반으로 찍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기술 개발이 예측을 허물었다. 정유업체들은 그동안 접근할 수 없던 깊은 바다 밑에 구멍을 뚫으면서 석유를 길어올리기 시작했다. 석유 종말론은 그렇게 잠잠해졌지만, 이후에도 유령처럼 끊임없이 나타났다. 때로는 미신이었지만, 종종 과학이었다.
석유 종말론, 미신 혹은 과학
올해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고가 나자, 석유 종말론은 다시 미국 사회를 흔들었다. 지난 11월15일 <afp> 기사를 보면,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데이비스대학의 연구진은 석유가 2041년께 고갈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구진은 석유 매장량과 인류의 석유 소비 증가 속도를 계산해 뽑아낸 결과라고 설명했다. 또 한 번의 종말론이다.
한편에서는 석유의 수요를 줄이려는 움직임도 있다. 석유를 태울 때 생기는 온실가스 때문이다. 온실가스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눈총을 받고 있다. 1997년 교토의정서를 계기로 주요 선진국들은 온실가스를 2012년까지 1990년 배출량보다 5.2% 줄이기로 했다.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에너지원의 사용을 대폭 줄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얘기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부가 앞장서서 화석에너지 사용을 줄이도록 기업들을 잡아끌고 있다. 지난해 말 지식경제부는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38개 대기업이 앞으로 3년간 에너지 사용을 연평균 1.0∼4.9% 줄이기로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당시 보도자료를 내고 “3년 동안 석유 소비량 150t이 줄어드는 효과가 난다”고 덧붙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석유의 시대’는 조금씩 종말로 옮겨가고 있다. 석유를 정제해 ‘먹고살아온’ 정유업체들에는 언젠가 발등에 떨어질 불이다. 국내 정유업체들이 미래의 먹을거리를 찾아 잰걸음을 하고 있는 이유다. 마음이 급하기는 외국의 석유 메이저들도 마찬가지다. 이 정유업체들이 찾은 활로는 어디에 있을까? 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대부분 신재생에너지가 있다. 전공인 ‘에너지’에서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대부분의 나라에서 미래 성장 엔진으로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정유회사들은 아직은 확실한 수입이 보장되는 정유·석유화학 사업에 한 발을 두고, 다른 발을 내디딜 신재생에너지 분야를 부지런히 살펴보고 있다.
GS칼텍스는 올해 경영목표를 아예 ‘미래로 향한 다리’(Bridge to the Future)로 정한 바 있다. 미래 신재생에너지와 신소재 사업 쪽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사업도 다방면에 걸쳐 벌여놓았다. 회사 쪽의 자료를 보니, 신재생에너지 쪽으로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분야만 폐기물 재생, 박막전지, 바이오에너지 등 10개에 가까웠다. 미래산업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앞으로 에너지원의 성패가 어디서 갈릴지 모른다는 기업 쪽의 조바심도 엿보인다. 이런 정서는 경영진의 높은 관심에서도 드러난다. 화공학 박사이기도 한 허동수 회장은 지난 11월 서울에서 열린 비즈니스 서밋에서 ‘녹색성장 분과위원회 에너지효율 워킹그룹’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회의에 참석한 뒤 자신의 누리집에 올린 글에서 회의 참석자들이 “(세계적인 트렌드인) 신재생에너지 확대 등에 대한 발전적 제안에 크게 공감”했다고 밝혔다.
철수한 로열더치셸, 성공적 안착한 BP솔라
GS가 특히 관심을 두는 분야는 친환경적인 에너지 저장장치의 소재다. 지난 3월 신일본석유와 손잡고 구미공장에서 ‘전기이중층커패시터’(EDLC)라 불리는 에너지 저장장치의 탄소 소재 생산을 시작했다. 이 저장장치는 하이브리드 전기자동차나 친환경 전기자동차에 사용된다. GS칼텍스의 강태화 차장은 “2015년까지 900t까지 탄소 소재를 생산하면 앞으로 5년 동안 2천억원 이상의 무역수지 개선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또 ‘2차전지’에 사용되는 ‘음극재’도 지난 10월 국산화에 성공했다. 2차전지는 재충전이 가능한 전지를 말한다.
SK에너지도 본업 외에 ‘외도’를 하고 있다. 곁눈질한 곳은 ‘리튬이온 배터리’ 분야다. SK에너지는 지난 2004년 세계 세 번째로 리튬이온전지 분리막을 개발하고, 2005년 12월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기술 개발은 수입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10월에는 다임러그룹 미쓰비시 후소사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들어가는 리튬이온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이어 지난 7월 현대·기아차그룹의 첫 순수 고속전기차로 양산될 블루온(Blue-On) 모델의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SK에너지는 또 2008년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일명 ‘그린폴’로 불리는 이산화탄소 플라스틱은 연소할 때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리돼 그을음 등 유해가스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회사 쪽은 설명했다. 구자영 사장은 지난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SK에너지는 더 이상 정유사가 아닌,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종합에너지 회사다”라고 말했다. 사업을 본격적으로 다각화하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현이었다.
정유회사의 ‘변신’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해외의 사례를 봐도 확인된다. 세계 최대 석유 메이저 업체인 로열더치셸은 2000년대 들어 태양열, 풍력, 수소, 조림사업 등에 백화점식으로 진출했다. 그렇지만 조림사업은 2003년에, 태양열은 2006년에 철수했다. 정웅태 에너지경제연구원 박사는 “셸은 사업 확장을 위해 많은 에너지 관련 부분으로 진출했지만 수익성 하락으로 다각화한 사업을 대부분 재정비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다른 예도 있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의 자회사인 BP솔라는 태양전력 생산과 시스템 분야에서 세계 최대 업체 가운데 하나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대응책 제각각인 국내 업계
국내 정유업체의 사업 다각화에 대한 평가는 아직 유보적이다. 이문배 에너지경제연구원 박사는 “정유업체들의 신재생에너지 사업 진출은 단기적인 수입을 노린다기보다, 아직은 장기적 위험 분산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응주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국내 정유업체가 벌인 사업 가운데 SK에너지의 리튬전지 사업이 안착했지만, 다른 사업은 아직 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정유업계 3, 4위인 에쓰오일이나 현대오일뱅크도 아직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대해 이렇다 할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 아직 경영권이 안정되지 않았거나 장기 투자를 할 수 있는 내부 여건이 덜 된 탓도 크지만, 여전히 ‘한 우물’을 파겠다는 이들 회사의 판단도 있다.
정유업체의 사업 다각화를 환영하는 의견도 있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시장연구실장은 “정유회사들이 종합에너지 서비스 기업으로 변신하는 것은 산업계의 큰 조류다. 석유 메이저들이 이제 환경친화적인 시대를 대비하는 것은 인류에게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화석에너지에서 친환경에너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석유로 돈을 번 업체들의 ‘변신’이 눈을 끄는 이유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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