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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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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 가문 특명, GS를 알려라!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LG그룹에서 에너지·유통 부문 GS그룹으로 떨어져나와…구씨와 허씨 57년 동업관계 잡음 없이 청산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964년 럭키(LG의 전신)는 삼성과 공동투자해 라디오서울(RSB) 방송을 개국했다.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은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과 경남 진주 지수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라디오서울은 그 뒤 동양방송(TBC)과 합병했는데, 경영의 어려움은 초기의 결손보다는 공동투자에서 오는 운영상의 대립에 있었다. 양쪽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공동운영을 청산하고 TV방송은 럭키가, 라디오는 삼성이 맡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청산 작업은 순탄하지 못했다. 결국 방송 운영권을 둘러싼 양쪽의 불화설까지 세간에 퍼지면서 럭키는 고민 끝에 방송사업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3대까지 내려오면서 정리할 필요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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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텔레비전·신문·라디오 광고에 ‘GS’ 브랜드가 한창 등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GS라는 회사가 어떤 기업이냐고 의아해하는 소비자들도 많다. 이를 보면 국내 재벌 2위인 LG그룹에서 GS그룹이 떨어져나오는 과정이 그동안 얼마나 ‘조용히’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LG와 삼성이 방송 사업을 둘러싸고 불화를 빚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재벌그룹마다 후계자 승계와 계열 분리 과정에서 시끄러운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기 일쑤였는데, LG그룹은 별다른 잡음이나 갈등 없이 회사를 분할했다. 특히 LG와 GS그룹의 분할은 자식들한테 사업을 나눠주는 형태가 아니라, 57년간 동업 관계를 유지해온 LG그룹 양대 오너 가문인 구씨와 허씨 가문이 동업을 끝내고 결별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끈다(상자기사 참조). LG전자 관계자는 “양 가문이 동업을 청산하고 서로 헤어져 간판을 따로 다는 마당에 잡음 한마디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그룹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조차 계열사가 양쪽 가문에 어떻게 나눠지고 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표면화된 분란이나 갈등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계열 분리로 이제 기존 LG그룹은 구씨 가문이, 새로 출범한 GS그룹은 허씨 가문이 독자적인 경영을 맡게 됐다.

흔히 ‘동업은 하지 마라.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 ‘동업하면 형제·친구간이라도 결국 의를 상하고 갈라서게 된다’고들 하지만 두 가문의 57년 동업은 이른바 ‘아름다운 동업’으로 불린다. 두 가문의 오랜 성공적 동업 관계는 ‘국제 경영학계의 연구대상’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동업은 빨리 망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가문이 오랫동안 동업 관계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같은 마을에서 자라고 보아온 두 가문의 신뢰와 의리가 동업 관계를 유지해온 힘이었다는 평도 있고, ‘역할분담의 미학’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다. 구씨 가문은 사업확장·공장건설 등 바깥일을 담당해 사업을 키웠고, 허씨 가문은 재무 같은 안살림과 영업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씨족간에 경영을 하다 보니 LG그룹은 느슨한 연방제 형태의 경영문화를 이뤘고, 이에 따라 LG는 ‘인화’(人和)를 주요 경영이념으로 삼았다. LG의 인력개발원 이름도 ‘LG인화원’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인화는 두 가문의 동업자 관계에서 비롯된 측면도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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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불화 없이 오랫동안 동업을 이어온 두 가문이 이제 헤어지게 된 이유는 뭘까? LG전자 관계자는 “창업 3대까지 내려오면서 예전의 창업 정신이 희석될 수도 있다”며 “양쪽 가문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대주주가 많아져 지분이 얽히고 설키면서 이해가 충돌할 수도 있고, 따라서 이제 자연스럽게 분리할 필요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동업 관계에 특별한 균열이 생긴 건 아니지만 이제 동업을 끝내야 할 상황에 왔다는 것이다.

사실 양쪽 가문의 동업 관계 청산은 몇년 전부터 예고됐다. 지난 2001년 LG그룹 계열 분리를 앞두고 구자경 명예회장과 허준구 명예회장(작고)이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허씨쪽은 “LG전선과 LG산전은 우리가 맡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구씨 가문도 LG전선그룹(LG전선·LG산전·E1·극동도시가스 등)은 구씨 가문의 다른 가계에 얽혀 있던 문제라서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결별을 앞두고 잠깐 불화가 빚어지는 듯했지만, 그룹 바깥으로 잡음이 새나가지 않고 금세 봉합됐다. 허씨 가문이 가족회의를 거쳐 깨끗이 양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큰돈 앞에서도 양쪽 가문 사이에 ‘인화’라는 불문율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2세 경영자인 구자경 회장 이후 지난 1995년 구본무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할 때도 LG그룹을 이끌어온 구씨 일가와 허씨 일가의 창업 세대들은 한꺼번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경영권 다툼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앤 것이다. 그 뒤 두 가문은 3대째인 구본무 회장과 허창수 LG건설 회장 중심으로 동업 관계를 유지해왔다. 구인회 창업주의 형제들이 맡고 있던 LG전선그룹도 2003년 별도로 떨어져나간 뒤 ‘LS그룹’이란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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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분야에 진출하지 않을 듯

구씨와 허씨 가문 분리의 밑그림이 완성된 건 2003년 초라고 할 수 있다. 지주회사인 (주)LG를 출범시킬 때 허씨 가문의 대표 격인 허창수 회장이 이끄는 LG건설을 포함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동업 관계 청산의 신호탄이었다. (주)LG 관계자는 “LG그룹이 몇년 전부터 사업구조조정을 하면서 단계적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이행했는데, 지주회사 전환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양쪽 가문의 결별과 최근의 GS그룹 공식 출범”이라며 “서로 잘할 수 있는 업종에 경쟁력을 집중한다는 것이 양쪽 가문 계열 분리의 원칙이었다”고 말했다. 기존 LG그룹은 LG전자·LG화학·LG텔레콤 등 제조업·정보통신 중심으로, 허씨 가문의 GS그룹은 에너지·유통 중심으로 재편한 것이다. (주)LG 관계자는 “GS그룹이 최근 기업이미지통합(CI) 선포식에서 밝혔듯, 양쪽 가문이 앞으로 상대방이 영위하는 업종에는 진출하지 않겠다는 신사협정을 맺었다”고 말했다. 삼성이 CJ(제일제당)와 신세계의 유통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않듯, 비록 동업 관계는 끝났지만 LG와 GS의 협력(?)이 지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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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그룹은 GS홀딩스(지주회사)·GS칼텍스(옛 LG칼텍스정유)·GS리테일(옛 LG유통)·GS홈쇼핑(옛 LG홈쇼핑)·GS건설(옛 LG건설) 등 15개 계열사로 이뤄져 있다. GS그룹에 LG칼텍스정유를 포함시킨 건 전국 3천여개 주유소를 비롯해 보너스카드 고객 보유 등 유무형 자산을 활용해 유통 관련 사업을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LG 브랜드를 포기하고 독자적인 브랜드 구축에 나선 GS그룹쪽은 자회사들이 유통·서비스 회사들이라서 옛 LG 브랜드의 그림자에서 빠르게 벗어나 소비자들한테 새로운 기업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GS홀딩스 여은주 부장은 “전국에 주유소 3300여개가 있고 GS25시, GS슈퍼, GS마트 등 어디에나 GS 간판이 내걸리게 되므로 GS 브랜드를 알릴 기회는 많다”며 “사람들이 GS의 유래가 ‘GoldStar’가 아니냐고 말하는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내포하는 뜻은 고객만족을 뜻하는 ‘Good Service’ 또는 ‘Great Satisfaction’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석꾼 사돈지간, 치약에 의기투합

동업자로 LG그룹을 이끌어온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사돈지간으로, 같은 마을(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의 만석꾼 집안이었다.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14살 때 허을수씨와 혼인을 치르면서 양가는 사돈지간이 됐다. 그러나 그 전부터 허씨 가문과 구씨 가문 집안은 사돈의 연을 맺으면서 친인척 이상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LG의 양축을 이룬 구·허씨 체제의 시발은 1947년으로, 구인회씨가 LG의 모체인 락희화학공업사(LG화학·대표상품 ‘럭키치약’)를 설립하면서부터다. 구인회 회장은 처가쪽 허남석씨와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사업 경험을 쌓은 뒤 1931년 당시 2천원의 자금을 가지고 진주로 진출해 진주시 대안동 중앙시장 안에 ‘구인회상점’ 간판을 내걸고 포목상(비단 도소매) 경영자로 성장했다. 연암은 해방 뒤 부산으로 사업 터전을 옮겨 1945년 조선흥업사를 설립한다. 그 무렵 연암은 처가쪽 허만정씨의 셋째아들 허준구(전 LG건설 명예회장)씨를 사업에 참여시켰는데, 허씨가 아들 경영수업을 구씨한테 의뢰하면서 동시에 락희화학공업사에 출자를 제의했다. 구인회씨는 이를 받아들여 락희화학 창립 직후 허준구씨를 영업담당 이사로 배치해 두 가문의 동업이 본격화됐다. 당시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65% 대 35%의 지분으로 사업의 동반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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