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기업, 氣uP!] ‘절수기 박사’ 대학 가다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기업, 氣uP! | 와토스코리아]

50줄에 늦깍이 대학생 된 송공석 와토스코리아 사장…공부하는 조직 만들어 회사 기반 다진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식목일을 하루 앞둔 4월4일 오전, 서울 종암1동 고려대 경영별관 B204호실. 알록달록하게 차려입은 30~40명의 젊은 수강생들 틈에 감색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끼어 있었다. 계단식 강의실 두 번째 줄에 자리잡은 노신사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공책에 뭔가를 적을 때 말고는 자세 하나 흩뜨리지 않은 채 강의에 몰입하고 있었다.

외환위기 때 대졸자 받아들여 성장

[%%IMAGE1%%]

‘절수기 박사’ 송공석(53) 와토스코리아 사장이 뒤늦게 대학에 들어와 자식 또래들과 한 교실에서 부대끼기 시작한 지는 이제 한달여. 정규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가 전부인데다 적지 않은 나이를 감안할 때 힘들 법도 하건만, 강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는 그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송 사장은 “내가 좋아하는 과목인 ‘사고와 표현’이었다”며 “젊은 학생들과 함께 배우는 일이 재미있다”고 웃었다.

송 사장의 와토스코리아는 ‘절수 도우미’로 통한다. ‘본 일’의 대소에 따라 밸브를 선택하도록 한 양변기용 절수기, 일정 시간 뒤 저절로 잠길 뿐 아니라 중도에 잠글 수도 있는 절수 샤워기 등이 모두 와토스코리아의 작품이다. 절수 관련 특허 및 실용신안 등 와토스코리아가 확보한 산업재산권이 무려 100여종에 이른다.

경영 실적을 보더라도 탄탄한 회사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지난해 와토스코리아는 매출 152억원에 30억원의 흑자(당기순이익)를 거뒀다. 직원 73명의 중소기업이 올린 실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수준이다. 더욱이 이는 반짝 실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굳어져온 흑자 기조다.

돈 잘 버는 중소기업의 소유주(지분 81%)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송 사장이 늦깎이 대학생으로 고행(?)의 길을 걷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배움의 길을 접어야 했던 한을 풀기 위해서일까?

많은 회사들에 재앙이었던 1997년의 외환위기가 와토스코리아에는 더없는 호재였다. 이는 또 송 사장이 뒤늦게 배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이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회사여서 전문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실업자가 많아지다 보니 우리 회사에도 대학 졸업자들이 적잖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후로 우리 회사 제품들을 본격적으로 수출도 하게 됐고, 회사가 크게 성장하는 바탕이 됐습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는 게 한편으로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자신의 역량만으로 이끌어갈 만한 규모를 넘어서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 이는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정식으로 경영학을 배워 리더십과 안목을 키우자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인재들을 현장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경력관리용 최고경영자(CEO) 과정이나 야간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데서 이런 뜻을 읽을 수 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까지는 적잖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우선 넘어야 할 산은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였다. 2003년 6월부터 시험 준비를 시작한 송 사장은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에 3명의 과외 교사한테서 학교 수업을 받듯이 공부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집중력 있는 공부 덕에 두달 만인 8월 합격증을 받아냈으며 이듬해 4월 대입 검정고시까지 통과하게 됐다.

70년대 양변기 부품 만들기 시작

대입 검정고시 합격 뒤 송 사장은 고려대 입학을 목표로 삼았다. 특별전형 제도가 있어 늦깎이 학생에겐 안성맞춤이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고려대의 특별전형 제도에선 발명품 개발, 사회 공헌도 등을 평가에 반영하는 가산점제를 두고 있어 송 사장에게 매우 유리했다. 그는 2001년에 특허 부문에서 산업포장을 받은 적이 있는데다 환경 관련 제품이나 절수 제품 개발로 많은 특허를 받은 상태였다. 회사의 이익금 일부를 주변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1% 나누기’ 운동을 회사 차원에서 벌인 공도 쌓고 있었다. 여기에 정부 지정 벤처기업의 경영자라는 사실이 힘을 보태, 송 사장은 92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마침내 고려대 경영학과 05학번 학우로 등록됐다.

[%%IMAGE2%%]

“많은 이들이 굳이 대학을 가려면 야간대학을 가라고 조언했지만, 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내 직성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2000년부터 회사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춰 제가 회사를 비우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고요. 수업 시간에 따라 오전, 오후로 나눠 학교와 회사를 오가며 일을 보고 있습니다.”

송 사장이 지금의 와토스코리아가 생산하는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것은 70년대 초. 사무원이나 기술직이 아닌 배달직이었지만, 기쁨은 컸다. 초등학교 졸업 뒤 무작정 상경해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 중국집 배달원, 고물장사, 자전거 배달로 전전한 뒤끝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취업한 회사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방만한 경영 탓에 곧 부도를 내고 말았는데, 회사의 부도는 뜻밖에도 그에게 좋은 기회를 안겨준 새옹지마였다. “회사가 부도를 내니 제품 품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제품을 배달하던 저는 어디에 가면 물건을 구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거든요. 제품이 남는 곳에서 모자라는 곳으로 연결해주는 공급업자로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공급업자로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중의 재고물량이 바닥나자 송 사장은 직접 양변기 부속품을 만들기로 한다.

송 사장이 2평도 안 되는 답십리 자취방에서 1인 기업 ‘남영공업사’를 차린 것은 1973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건설 붐이 일던 때였다. 서울에선 청계천 뚝방을 헐어내고 호텔을 지었으며,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화장실 문화가 지금의 수세식으로 바뀌는 때이기도 했다. 양변기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로선 만들어놓기만 하면 파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호황을 탔다.

송 사장은 확장 경영을 시도하다가 두번에 걸쳐 ‘쫄딱 망했다’고 할 정도로 호된 시련을 겪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그때는 어렵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워낙 ‘빈손’이었으니 잃은 것도 없다 싶었지요.” 이때 겪은 시련은 그의 회사가 외환위기를 거뜬히 넘기고, 건설경기 불황에도 아랑곳없이 성장세를 이어가는 든든한 바탕이 됐다.

“공대생 포함하는 서클을 만들겠다”

송 사장은 “회사 기반을 더욱 다지기 위해선 공부하는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며 “우선은 직원들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영어 능통자를 중간 관리자급으로 뽑아 회사 일과 영어 교육을 아우르도록 하는 구상을 마련 중이다. 소정의 교육 과정을 거친 뒤 좋은 성적을 올리는 이들에게는 2호봉씩 올려주는 인센티브(유인책)도 줄 생각이란다.

그에게 또 하나의 관심사는 동료 학생, 특히 공대생들을 많이 사귀는 일이다. 회사에 필요한 기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다. “2학년 올라가면, 공대생들을 포함한 서클을 하나 주도적으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방학 동안 회사 연구소에서 기술 구상부터 개발 단계까지 전 과정을 수행하도록 해보려고요. 200~300년 이상 가는 회사의 터전을 다지기 위해서입니다.” 오후 강의는 ‘글로벌 비즈니스’라며 강의실로 발길을 돌리는 송 사장의 뒷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