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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주자들에게 과학정책을 묻는다

등록 2007-06-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공계 출신이라는 박근혜·‘국제 과학 비즈니스 도시’를 구상하는 이명박, 화려한 공약이 빠뜨린 중요한 질문들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대통령 선거가 아직 멀었지만, 이미 출마를 선언하고 경쟁에 나선 후보들은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일찌감치 큼지막한 대선 공약들을 내놓고 있다. 이번 선거판에서는 과학기술이 비교적 일찍 정책 대결의 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지지도가 높은 박근혜와 이명박 두 대선 주자는 날로 그 중요성이 높아지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과학기술계의 환심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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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2월 일찌감치 과학기술에 대한 자신의 정책을 밝혔다. 요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과학기술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0~70년대에 과학기술 투자로 가난을 극복한 것이 1차 과학기술 혁명이라면 이제는 저성장에서 고성장으로 올라서기 위한 ‘2차 과학기술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확대와 집중 육성,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중심으로 한 7개 전략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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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정책의 업그레이드일까

박 전 대표는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과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역대 대통령 중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았다고 인정하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자신이 누구보다 과학기술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실제로 박근혜 캠프가 공식적으로 밝힌 과학기술 자문그룹에는 과거 박 대통령 시절 과기처 장관을 지냈던 사람들도 포진해서 과학기술계의 연장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난해 말 한 엔지니어링 관련 단체를 찾았던 박근혜는 “아버지처럼 과학기술 발전을 전폭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강연을 하면서 아버지라는 말을 여섯 차례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한편 경부운하 건설이라는 메가톤급 구상을 오래전에 내놓아 시민들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심심치 않게 입에 올릴 안줏거리를 만들어주며 이른바 ‘토건 공화국’의 수장을 꿈꿔온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자신에게 잘 어울림직한 ‘국제 과학 비즈니스 도시’ 계획을 핵심 대선 공약으로 내놓았다. 그가 지난해 서울시장을 퇴임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대선 공약을 정비하기 위해 유럽을 찾은 것이다. 당시 그는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열기 위한 신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과학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과학도시에서 청·장년 과학자 3천여 명이 한꺼번에 근무하는 세계 지식의 보급창고가 된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른바 나노를 넘어 펨토, 즉 1천조 분의 1m 수준의 과학을 앞장서 개척하면 우리나라가 미래 성장동력을 얻어 과학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실질적인 그의 과학기술 자문집단인 은하도시포럼이 주최한 ‘펨토 과학도시 국제포럼’에서 그는 이 도시가 “기초과학과 미래과학의 인프라를 구축한 지식경영의 중심이 되고, 대한민국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고, 10년 안에 4만달러 시대로 이끌 견인차”라고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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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을 앞둔 두 대선 주자들은 뒤질세라 화려한 공약의 잔치를 벌이고, 서로 상대의 공약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 두 사람은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은 그것을 꾸미는 장식들을 제거하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선거철마다 나온 공약의 재탕 삼탕에 불과하다. 요약하자면,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만이 살길이다.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전폭적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2 과학혁명과 대한민국의 업그레이드를 외치지만 정작 그 내용은 박정희 시대의 캐치프레이즈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의 성장주의와 “싸우면서 건설하자”의 개발지상주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천년대로 접어들어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몇만달러로 표시되는 ‘묻지 마 성장’이 아니며, 맹목적인 과학지상주의나 돈만 퍼부으면 되는 과학계 지원이 아니라 이미 세계 11대 경제대국이 된 현 상황에서 요구되는 구체적인 과학정책의 내용들이다. 즉, 성장과 과학의 내용이 무엇인가이다.

지구 온난화, 에너지, 공공의 과학…

몇 가지만 짚어보자. 두 후보 모두 최근의 경기 침체와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됐던 이공계 위기론에서 나온 주제들을 적당히 버무려 과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기초과학 투자를 대폭 늘려 경제발전을 위한 성장동력을 마련하자는 것이 공약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공계 위기론에 대한 반성이 엉뚱하게 변질되어 최근 정부 정책이 엘리트 과학자 만들기와 연구비 몰아주기로 나타나고 있는 현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과연 이런 공약들이 세계를 뒤흔든 황우석 논문 사기 사태를 겪은 뒤에 나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또한 과학기술자의 처우 개선을 논하려면 정작 연구의 꽃이면서도 불안정한 지위에 있는 비정규직 연구자들의 문제, 그리고 비민주적 실험실 상황이 거론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엘리트 출신 과학자들이 아니라 묵묵히 일하는 젊은 과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선진 외국의 선거에서는 그 나라에서 중요한 과학기술적 주제에 대한 의견이 후보 검증의 중요한 절차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풍토가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과학은 60년대처럼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로만 매진할 수 없는 수많은 과제와 쟁점들을 안고 있다. 가령 최근 몇 년 그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해 박근혜와 이명박은 어떤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 특히 개발과 건설로 모든 정책을 환원시켜 온난화를 가속할 우려가 있는 이 전 시장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묻고 싶다. 박근혜나 이명박이 주장하는 이른바 성장동력으로 꼽히는 분야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기초과학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상황은 단순한 성장이 아닌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면서 나아가야 할 성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뒤면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들려오는데도 우리 대선 주자들이 구상하는 과학에는 그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나 조사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전혀 탑재되지 않았다.

에너지 문제는 어떠한가?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는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최근 부지가 선정되어 표면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된 듯하지만 선정 방식의 문제점은 아직도 불씨를 남기고 있다. 이런 갈등이 빚어지는 좀더 근본적인 원인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의 기본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정부도 국민에게 원자력을 사용할지 묻지 않았고, 국민도 정부에 묻지 않았다. 에너지 문제는 성장의 방향 및 내용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대선 주자들은 어떤 청사진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장기적인 공론화와 숙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지 밝혀야 한다.

무엇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 과도한 경쟁과 급속한 과학의 상업화는 ‘공공을 위한 과학’이라는 오랜 신념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아무도 과학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한 과학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대선 주자들은 저마다 첨단과학 개발을 외치지만 현재 그들이 내놓은 공약만으로는 그 혜택이 소수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단순히 과학을 발전시키겠다는 주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난 황우석 사태에서 정부, 언론, 그리고 상당수의 시민들이 “원천기술만 있다면 윤리적 문제는 접어둘 수 있다”는 데 동조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과학이 오로지 경제성장의 도구라는 해묵은 인식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황우석 사태는 공익, 윤리, 사회적 책임을 포괄하지 않는 과학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하여

앞으로 대선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다. 대선 주자들이 과학에 대한 공약을 내놓을 때는 최소한 이런 물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토록 많은 후보들이 주장하는 성장이 이런 주제들과 별개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환경, 윤리, 그리고 공익성과 같은 가치들을 중심에 놓지 않는 한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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