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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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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인종서사 갈아치우자...<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받은 에세이집 <마이너 필링스> 펴낸 시인 캐시 박 홍
등록 2021-08-31 15:00 수정 2021-09-01 02:13
Ⓒ Beowulf Sheehan

Ⓒ Beowulf Sheehan

독일에 거주하는 5년 동안, 코로나19 상황에서 겪었던 노골적인 인종차별 말고도 나를 스쳐갔던 무수히 많은 미세 차별이 있었다.

파트너가 자전거 사고로 크게 다쳐 응급실에 갔던 날,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어도 겨우 상처 소독과 뇌에 이상이 생겼는지에 대한 간단한 체크만 이뤄졌다. 2시간 넘게 기다려 겨우 들어간 진료실이었다. 그리고 나온 진료비는 150유로(약 20만원). 가입된 보험 처리를 위해 긴 문서를 작성하는데 한 의료진이 말했다. “독일에 여행 왔나요?”

차별을 느끼는 게 ‘망상’일까

순간 차오르는 분노로 눈앞이 아찔했다. 응급실에서 5시간째 모든 의료진과 독일어로 소통하고, 거주지와 비자 정보가 적힌 보험 관련 서류를 다 제출했는데 나보고 여행을 왔냐고! 며칠 후 평소 인종차별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눈 독일인 친구에게 응급실에서 있었던 상황과 당시 느낀 감정에 대해 전했지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답했다. “난 그 의료진이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 같은데? 네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 아닐까.”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자, 어느 순간 나는 내 감정을 믿지 못하는 상태에 놓였다. 어떤 장소이든 내가 독일어로 말하는데 상대가 계속 영어로 이야기할 때, 다른 손님에게는 환히 웃으며 독일어로 인사하던 가게 주인이 독일어로 인사하는 나에게만 대꾸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보일 때 생각했다. ‘차별이라고 느끼는 건 내 피해망상일까.’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계 미국 작가로 꼽히는 캐시 박 홍(사진)은 이런 감정을 두고 ‘소수적 감정’, 즉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소수적 감정은 자신이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한 감정이다. 일상에서 겪는 인종 체험에 앙금이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임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캐시 박 홍 역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남에게 폄하당하는 경험을 너무 여러 차례 겪다보니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감각 훼손은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이라는 소수적 감정을 초래한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민자 2세대가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솔직하게 성찰하고 따져 물은 결과물이다. 197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저자는 <뉴욕타임스> <보스턴 리뷰> 등 여러 매체에 시를 발표하는 시인이다. 미국 럿거스대학 뉴어크캠퍼스 예술대학원 석사과정 교수(문예창작과)로도 재직 중이다. 2002년 첫 시집 <몸을 번역하기>, 두 번째 시집 <댄스 댄스 레볼루션>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팬데믹 이전에 쓰인 <마이너 필링스>는 미국 전역에 봉쇄 조치가 내려지기 몇 주 전인 2020년 2월 출간됐고, 아시아인 증오범죄가 급증하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독자가 늘어나면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뿐 아니라 각종 유력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퓰리처상 파이널리스트와 앤드루 카네기상 우수상 후보에 올랐으며,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자서전 부문)을 받았다. 최근 미국 문학계가 분야를 막론하고 인종차별과 혐오, 배제에 대항하는 주제와 메시지에 주목하는 점도 <마이너 필링스> 흥행의 이유다. <한겨레21>은 2021년 8월17일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캐시 박 홍과 전자우편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계 미국 작가로 꼽히는 캐시 박 홍의 자선적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의 영문판(왼쪽)과 한글판. 이 책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민자 2세대가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솔직하게 성찰하고 따져 물은 결과물이다.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계 미국 작가로 꼽히는 캐시 박 홍의 자선적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의 영문판(왼쪽)과 한글판. 이 책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민자 2세대가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솔직하게 성찰하고 따져 물은 결과물이다.

“자신의 불편함을 향해 글을 쓰라” 했던 것처럼

첫 에세이를 완성한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이 책을 출간하게 돼 무척 기뻐요. 많은 독자가 제 경험에 얼마나 깊이 공감되는지 말해주었고, 그 덕에 감사함과 덜 외로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이 책 덕분에 상상도 못했던 일이 많이 벌어졌죠. 저는 항상 글 쓰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불편함을 향해 글을 쓰라고 말하는데요, 그 조언을 저 자신도 잘 받아들인 것 같아 기쁩니다.”

1965년 미국으로 이주한 저자 부모와 같은 이민 1세대는 ‘미국인이 아니어서’ 차별받지만, 저자와 같은 2세대는 ‘백인이 아니어서’ 차별받는다. 영어로 교육받고 일하는 미국인이지만 어느 누구도 미국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데서 고통이 시작된다.

저자는 13살 때 이모가 사는 아파트 단지 수영장에서 사촌동생과 수영하다 백인 주민에게 내쫓기며 이런 말을 듣는다. “이제 저것들이 사방에 깔렸네.” 같은 해 여동생과 함께 간 쇼핑몰에서는 한 백인 부부가 출입문을 열 때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난 중국놈들한테는 문 안 잡아줘!”라는 고함을 들어야 했다. 그때 여동생은 울음을 터뜨렸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시인이 된 이후로도 저자는 문학인으로서 자꾸 좌절당하고 삭제당하는 경험을 한다. 단순히 작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의심을 자연스레 품게 됐다. 인종에 대해 쓰지 않아도 ‘아시아 여성’ 글로 읽혔고, 자연에 관해 쓰면 ‘자연에 관해 쓰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는 모순적인 현실을 마주했다.

<마이너 필링스>는 태어날 때부터 아시아인이어서, 여성이어서 겪은 구조적 차별 앞에 저자가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저자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음”을 깨닫는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저자에게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내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짐작보다 까다로웠는데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은 저자로 하여금 “내가 미국에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색인종 작가는 인종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그 이야기 역시 백인이 상상하는 대로 구성돼왔음을 보게 된다. “미국인들은 일정 기한이 지나면 우리가 인종 문제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비록 회의적이지만, 이 기회에 우리가 미국 문학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자동으로 규정하는 낡은 인종서사, 우리의 삶을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다양한 현실을 삭제해버리는 낡은 인종서사를 갈아치우자는 것이다.”

흑인민권운동에 고마움과 연대를 표현해야

책에 낱낱이 파헤쳐져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차별을 읽다가 한국 내 이주자 차별을 떠올렸습니다. 당신도 “한인 사회에 존재하는 흑인에 대한 반감이 부끄럽다. 그래서 아시아인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적었고요. 한국에서 소수적 감정을 갖고 사는 건 누구일까요.

“2008년 이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지만, 한국도 이전에 비해 많이 변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과거 제 경험에 비춰보면 한국은 단일민족 공동체란 생각이 강했고, 이런 태도는 이민자 사회에 상처가 됐을 거라 짐작됩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아시아 여성이 제대로 된 권리를 갖지 못하고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아프리카계 한국인도 끔찍한 차별을 겪고 있고요.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흑인) 교수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난생처음으로 흑인을 비하하는 욕을 들은 곳은 미국이 아닌 서울이었다고 해요. 아시아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획득한 평등은 대부분 흑인민권운동과 지금도 진행 중인 흑인의 평등투쟁 덕을 본 것이기에, 이에 대한 고마움과 연대를 표해야 한다고 봐요.

아마 한국 여성들도 소수적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미투 운동과 한국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이 계속 성장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하지만 여성의 평등을 향한 요구가 자신의 권리를 박탈한다고 말하는 안티세력의 목소리도 듣습니다. 이것은 백인 보수주의자들이 흑인, 아시아인, 라틴계 사람들이 평등을 요구할 때 하는 말입니다.”

한국은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약 200만 명, 다문화가구가 35만 가구에 이르지만 ‘인종주의’ ‘인종 트라우마’가 아직 낯선 단어입니다. 한국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한국인이 아닌 제가 감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불평등을 알리려는 조직이 있다면 한국인이 그 조직을 지원하고, 기부하고, 널리 알렸으면 해요. 이러한 소수자들에게 기고문, 인터뷰 등과 같은 플랫폼을 제공하고 커뮤니티 출신 작가들의 글을 가능한 한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이너 필링스>는 영화 <미나리> 제작사에 의해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차기작도 궁금합니다.

“한국인 엄마와 딸들의 구술 역사를 토대로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아름다움, 자본주의, 냉전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우리가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저자의 답변을 읽는 내내 데버라 리비의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책 구절이 떠올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작가 데버라 리비는 자라는 동안 자신을 지켜주는 주변인들에게 계속 ‘큰 소리로 말하라’라는 말을 듣는다. “여자애들은 큰 소리로 말해야 해. 우리가 뭐라건 어차피 아무도 안 듣거든.”

캐시 박 홍 역시 책에 적었다. “우리가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우리의 수치심은 억압적인 아시아 문화와 우리가 떠나온 나라에 의해 초래된 것이고, 미국은 우리에게 오로지 기회를 주었을 뿐이라는 신화를 영구화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한국계 미국인 여성작가인 스테프 차, 이민진, 미셸 자우너, 태 켈러 등의 작품이 주목받고 그들의 커진 목소리를 듣는 일이 달갑다. 이들의 목소리는 이민자 2세대의 자전적인 글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소수적 감정을 가진 이들에게 이어지고, 전달된다. 캐시 박 홍은 책 마지막에 “우리는 늘 이 나라에 있었던 존재다”라고 적었다. 이 문장은 지금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와닿는다. 늘 이 나라에 있었던, 소수적 감정을 지닌 이들에게.

채혜원 객원기자·<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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