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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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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성폭력 생존자들 “아버지에게 120년형 선고합니다”

책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 펴내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
등록 2020-10-13 21:23 수정 2020-10-15 19:30
친족 성폭력 경험을 가진 생존자들이 지난 9월18일 인터뷰에 앞서 연대의 의미로 손을 잡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생존 경험을 다룬 수기집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제작하기 위해 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친족 성폭력 경험을 가진 생존자들이 지난 9월18일 인터뷰에 앞서 연대의 의미로 손을 잡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생존 경험을 다룬 수기집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제작하기 위해 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친부는 즉시 친권을 박탈하고 피해자에 관한 모든 법적, 사회적 관계를 파기하며, 피해자의 양육권은 국가가 환수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성장할 수 있도록 가해자로부터 분리하여 보호하고 (중략) 가해자에게 어린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과 공포를 똑같이 느끼도록 하는 형벌을 지속적으로 집행할 것이며….”(<세상의 소고(溯考, 訴告)> 중)

글 쓰는 것, 편집 모두 겁이 나서

엄마가 돌아가신 지 1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명아(40대 초반)는 “한마디 원망도 듣지 않고” 죽어버린 ‘그자’(아버지)를 약 30년 만에 가상 법정에 세웠다. 그리고 ‘그자’가 받기 바랐던 형벌을 담은 판결문을 직접 썼다. 징역 120년형. 죄질이 심각한 점 등이 가중 요소가 됐다. 친족 성폭력 피해로 명아를 죽은 채 살도록 했던 ‘그자’에겐 마땅한 형벌이었다. 명아는 ‘그자’가 죽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소장을 써서 경찰서를 찾기도 했다. “가해자가 살아 있을 때 아무것도 못했다. 오히려 가해자의 병간호와 상주 노릇을 해야 했다. 비석이라도 있으면 가해자라고 쓰기라도 할 텐데 화장해버려서 못했다. (그가 성폭력 가해자라는) 증거를 뭐라도 남기고 싶어서 고소장을 냈다.” 명아가 담담히 말했다.

명아의 이야기는 책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에 실렸다. 책에는 명아처럼 아버지나 오빠 등 친족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12명이 쓴 생존 경험이 담겼다. 에세이가 11편, 만화가 1편이다. <한겨레21>은 2020년 9월18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생존 수기를 쓴 6명을 만났다. 애초 인터뷰엔 조제·명아·최예원 3명이 참석하기로 했지만, 응원 차원에서 정인·평화·푸른나비가 연대했다(최예원 외 모두 닉네임).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인터뷰에 참여할 예정이 없었던 셋도 입을 열어 말을 보탰다.

책을 기획한 사람은 푸른나비(50대 초반)였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에서 활동하는 푸른나비는 <한겨레21>의 ‘#오빠 미투’(제1273호, 제1277호) 기사에 인터뷰이로 참여했다. 피해에서 회복하려면 “(피해에 대해)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푸른나비는 2019년 여름, 같은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먼저 자조모임에서 만난 생존자들과 연대했다.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해 책을 만들기로 했다.”(푸른나비) 친족 성폭력 경험을 트위터에 꾸준히 써온 조제(30대 후반)도 뜻을 보탰다.

‘가족’이라는 1차 안전망에서 성폭력을 경험하고 배제된 이들이 자기 경험을 세상에 털어놓기란 쉽지 않았다. 원고를 내고도 결국 책에 싣는 것을 거절한 생존자도 있었고, 수기를 쓴다고 했다가 못 쓰겠다며 여러 차례 마음을 바꾼 생존자도 있었다. 마감 전까지 마음 정하기 어려웠던 정인(40대 후반)은 “글을 쓴다는 건 발가벗겨지는 느낌이었다. 다 옷 입고 있는데 나만 부끄럽게 (옷 벗고)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정인은 마지막까지 고치던 문장을 뺐다. 푸른나비가 말했다. “(원고를 싣기) 겁나는 마음을 알기에 그대로 인정하려고 했다.”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 김진수 선임기자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 김진수 선임기자


죽기 전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려고

책에서 가해자는 ‘그자’ ‘가해자’ ‘남자 형제’ ‘애비’ 등으로 지칭된다. 가해자를 오빠나 아버지라는 혈연의 이름으로 호명하고 싶지 않다는 생존자들의 마음이었다. “‘애비’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순화어다. 다른 사람에겐 소중한 부모겠지만, 나에겐 가해자인 ‘애비’일 뿐이다.”(평화, 20대 초반) “오빠라는 호칭을 쓸 수 없었다. 그냥 객관적인 단어인 ‘형제’라고 썼다.”(정인)

생존자가 쓰고 싶은 대로 쓰게 했다. 명아는 4쪽 분량에 피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가해자 처벌에 무게를 뒀다. 최예원(20대 초반)은 18쪽 분량의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라는 글에 오빠와 아버지에게서 입은 피해 당시의 상황과 “네 잘못”이라고 비난하던 엄마, 가족에게 내쳐져 혼자 살던 시기에 겪은 성폭력까지 상세히 적었다.

최예원처럼 가족 내 성폭력을 방관하고 2차 가해를 한 가족에 대한 원망은 글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들은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하거나, ‘피해 유발’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최예원은 “나를 성폭행한 혐의로 (아버지가)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데도, 엄마는 내가 누명을 씌운 거라고 한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었지만, 죽기 전에 겪은 일을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려고 쓰고 또 썼다”고 말했다. 전업 작가가 아니기에 이들의 글은 때론 투박하고 때론 어지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생존 경험이 날것으로 적혀 있다.

이들에게 꿈이 하나 더 있다면 더 이상 피해자로 숨지 않겠다는 뜻으로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든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이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말하고 진실을 밝히는 행동을 하는 것. 2019년 친족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 청원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당사자이기도 한 푸른나비는 “우리 이야기를 할 더 큰 장소가 필요하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평화를 다른 친족 성폭력 생존자도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2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며 13살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는 폐지됐다. 이에 따라 성인이 된 뒤 가해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게 됐지만, 2011년 이전 사건은 소급되지 않는다. 또 피해 당시 나이가 13살 이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친족 성범죄는 2016년 728건, 2017년 779건, 2018년 861건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책은 기획부터 집필, 편집, 교열, 펀딩까지 모두 생존자들의 힘으로 했다. 출판사에 책 출간을 맡기는 것도 고려했지만 “다른 사람에 의해 원고가 편집되지 않고 온전히 생존자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싣기 위해”(조제) 펀딩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텀블벅에서 펀딩이 진행 중인 책은 목표액 200만원을 훌쩍 넘어 877만원(10월5일 기준)이 모였다. 11월13일까지 펀딩은 진행된다. “우리끼리만 서로 지지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세상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명아)

유일하게 만화로 피해를 그린 조제는 ‘일단 지금은 살아 있길 잘했어’로 글을 마무리한다. 조제는 가을바람을 느끼고, 맑은 하늘과 푸른 새싹을 보면서 “살아 있기 잘했음을 느끼게 해줄 것”을 찾는다. “어릴 땐 나만 겪는 일인 줄 알고 혼자 힘들어했다. 우리 책을 보는 어린 소녀들이 혼자만 겪은 일이 아님을 알고 도움을 요청했으면 좋겠다.” 최예원이 말을 보탰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 살아남으라는 생존자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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