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조트는 세 식구가 각자 가장 중시하는 ‘여행의 필수조건’에 부합했다. 어린 딸은 리조트에 딸린 야트막한 해변에서 종일 물놀이를 했다. 남편은 수준급 시설인데 제주도 호텔 절반도 안 되는 숙박비에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를 느꼈다. 피로한 나는 리조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필요가 없는 ‘올 인클루시브’(모든 것이 포함됨) 하나면 그만이었다.
사실 야트막한 해변, 가심비, 올 인클루시브를 충족하는 곳은 너무 많다. 그런데 왜 ㄱ리조트였을까. 체력이 호기심을 못 따라가는 나이, 부부의 여행 무게중심이 ‘미지의 장소에 대한 설렘’에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으로 급격히 이동하던 찰나, 세 식구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그곳을 발견했다는 설명이 가장 사실에 부합한 것 같다.
편안하자고 하면 집에서 쉬면 되지 않는가. 김영하 소설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은 미루고 있는 일을 떠올리게 하고, ‘집안의 상처’는 집안 사람들에게 해준 뼈아픈 말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전쟁처럼 집을 마련해놓고는, 집에서는 쉴 수가 없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는 전남 여수에 마련한 작업실 ‘미역창고’에서 를 썼다. 그는 책에서 ‘슈필라움’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에드워드 홀의 ‘공간학’에서 빌려온 이 단어는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는 최소공간’을 말한다. 몇 명은 여행지에서 슈필라움을 찾은 것 같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나로 살 수 있다.
그 낯선 여행지에는 낯선 것이 하나도 없다. 장인숙씨는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가게를 가지만 다 엇비슷하다. 14년째 여름이면 같은 곳으로 가는 김미경씨나 매년 여름엔 만리포, 겨울엔 평창을 가는 김송은씨나, 공간적으로 같은 여행지가 지난해와 똑같지 않다. 만나는 가족의 아이는 나이 들어가고 펜션의 개와 점점 친해진다. 기선 만화가는 우주가 관망하는 인연의 끈이 여행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떠나도 그리운 그곳, ‘도돌이표 여행’ 얘기를 따라가보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아주 오래전, 나는 조인성과 소지섭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몰랐다. 그렇게나 화제가 됐던 드라마 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전 인가 에 관련 기사가 실렸을 때 이제 드디어 알겠구나 싶었는데, 아이코! 두 배우 사진 아래에 설명이 없어서 얼굴은 알아도 누가 누군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안다). 들은 가락은 있어서 신혼여행지나 휴양지쯤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할 만큼 관심이 없었고, 발리에 다녀온 지인이 한번 가보라고 권해도 시큰둥했다.
그러던 내가 가족여행지로 발리를 택한 것은 우연이었다. 미얀마 바간처럼 간절히 원해서 벼르고 벼른 끝에 여행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냥 가봤다가 발이 묶였다. 그 뒤로 내 여행의 좌표는 지리적으로 발리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들의 섬’이라는 발리가 조화를 부린 까닭일까? 이제 그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발리에 처음 간 때는 2006년 8월이었다. 그렇게 멀리 가본 것은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고 감탄을 자아냈다. 더불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했을 일종의 (문화)사대주의가 슬슬 깨지고, 발리가 속한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를 향한 호기심과 애정이 피어오른 것도 그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2006년부터 거의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아무 이견 없이 발리로 떠나 머물렀다. 큰딸이 고3이던 때 1년 외에는. 대부분 여행이 그러하듯, 우리의 발리 여행도 늘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첫 여행 때는 변두리 와룽(식당)에서 나시고렝(볶음밥) 40그릇을 먹을 수 있는 20만루피아(약 2만원)를 가족 모두가 말똥말똥 지켜보는 가운데 환전 사기를 당했고, 때로는 가족이 사이좋게 돌아가며 아프기도 했고, 2014년에는 가장 저렴했던 말레이시아항공을 예약해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항공사 소속 여객기가 실종되는 사고가 나서 마음을 꽤 졸였다. 그 이듬해에는 자바섬 동부의 라웅화산이 분화하는 바람에 경유지인 홍콩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하필 그해에 발리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 가장 많았다. 남편 안식월을 맞아 난생처음 한 달 동안 여행한 해에는 전자우편으로 예약한 숙소 세 군데가 짜고 치기라도 하듯 말썽을 빚어 노숙할 뻔도 하는 등, 우왕좌왕 좌충우돌 소소한 사건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발리가 확 변했다. 발리 예술마을이라는 우붓에 스타벅스가 생겼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뿐이 아니다. 널따란 논을 따라 이어지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산책길 주변으로 온갖 화려한 숙박업소가 들어서고 있다. 발리 현지인이 운영하고 발리 분위기가 물씬 풍겨 매력적이던 타만하룸도 점점 서양식 분위기가 짙어간다. 문둑으로 가는 길목의 울룬다누브라탄 사원에는 이상한 구조물들이 덧붙고, 탐블링안호수와 부얀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는 비슷비슷한 인증사진 휴게소가 난립하고….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좀더 여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보편 소망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다만 이제 발리에도 자본의 입김이 거세게 몰아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싸해진다.
그런데도 나는 왜 자꾸 발리에 가는 걸까? 무엇보다도 애틋하게 그리운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첫 여행 때 공항 면세구역을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만난 수카다나는 우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국어 가이드가 되었다. 그가 조용하고 알뜰한 줄리와 가정을 이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번잡한 곳을 피하느라 6년여 전부터 해마다 출석도장 찍듯 방문하는 문둑의 홈스테이에는 집밥처럼 소박하고 푸짐한 식탁을 차려내는 크툿 아주머니가 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 가족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분에게 사육당하곤 한다. 마을공동체에 더 많이 기부하고 직원들에게 더 많은 월급을 주는 날을 꿈꾸는 며느리 일루는 호박이라는 식물 하나로 몇 가지 반찬을 뚝딱 만들어낸다. 남편이 목말 태워주던 윈다는 1등을 놓치면 속이 상해 우는 고등학생이 됐다. 소녀에서 아기 엄마가 된 수치, 딸들이 진정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또 다른 일루, 우리에게 바가지 씌우려던 동네 친구의 행실을 전해듣고는 헐레벌떡 뛰어오던 카덱, 작은 선물에 고마워하며 우리 가족 모두 잘되라고 신에게 빌어준 꼬망 등등….
하 많은 사람이 나를 자꾸만 발리로 이끄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소중한 인연의 그물에 걸린 나는 올해도 가장 저렴한 발리행 싱가포르항공편이 뜨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릴 터이다.
사진 장철규 제작·콘텐츠유통 담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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