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따뜻함

도시 주변을 떠도는 마이너리티들의 꿈도 현실도 아닌 영화 <춘몽>
등록 2016-10-30 14:42 수정 2020-05-03 04:28
장률 감독의 열 번째 상업영화 <춘몽>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의 존재들을 애처롭고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장률 감독의 열 번째 상업영화 <춘몽>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의 존재들을 애처롭고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아주 오래전에 경기도 고양시 덕은동이란 곳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 사는 중학생 아이 둘이 국어 과외를 의뢰해서 낯선 동네로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과외 첫날 아이가 나에게 건넨 것은 버스 시간표였다. 한쪽으로는 일산, 한쪽으로는 서울 마포구와 은평구를 접한 그 동네는 신도시 개발에 포함되지 않아 섬처럼 고인 곳이었다.

은평구 수색동에서 내려 30~40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나무로 둘러싸인 그 집 앞에 도착하곤 했다. 낮과 밤의 경계쯤에 그 집에서 나와 서울로 돌아가곤 했다. 환할 때 덕은동에서 출발해 어둑할 때 수색에 내려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가 1시간에 겨우 한두 대씩 다니는 적막한 동네와 번잡한 서울 시내를 이어주는 정거장이던 수색은 어느 쪽의 색도 띠지 않았다. 차를 갈아탈 때 만난 시커먼 어둠 빼고는 달리 어떤 색깔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 그 동네는 늘 성실하고 단조롭게 사람들을 내려주고 다시 실었다.

경계에 놓인 이방인들

영화 은 수색을 배경으로 한다. 서울 변두리에 사는 별 볼 일 없는 청춘들을 둘러싼 꿈도 현실도 아닌 이야기다. 영화는 영화와 현실, 안팎의 경계를 넘나든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예리는 배우 한예리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충무로의 젊은 감독 세 사람도 주연배우로 나섰다. 자기 영화를 연출하고 연기했던 양익준, 박정범, 윤종빈 감독이 그들이다. 셋 모두 대표작의 캐릭터와 비슷한 인물로 그려진다.

한물간 동네 건달 익준은 의 용역 깡패 상훈과 겹쳐 보이고, 월급이 밀려 악덕 사장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탈북자 정범은 에서 한국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고 전단지를 돌리며 생계를 이어가는 탈북자 승철을 떠올린다. 이들 중 유일한 유한계급 청년 종빈은 예리가 세들어 사는 집의 건물주 아들로, 간질을 앓는 청년이다. 그는 에서 부조리한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을 맨 지훈과 일부 겹친다.

중국에서 건너온 예리는 어릴 적 외도로 가정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찾으러 한국에 왔다.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수소문 끝에 만난 아버지는 눈도 제대로 끔벅하지 못하고 잠들듯 병들어 있다. 예리는 세들어 사는 집 앞에 가건물을 세워 ‘고향주막’을 운영하는데 이곳을 찾는 세 명의 단골이 익준, 정범, 종빈이다.

고향주막을 자꾸만 기웃대는 이들은 하나같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다. 고아원 출신 익준은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고, 정범의 고향은 북쪽이며, 종빈의 고향 수색은 언젠가 개발자본에 싹 밀려 사라질 테다. 그리고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예리를 좋아하는 레즈비언 주영이 있다. 이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그들의 동네처럼 어느 곳에도 발 딛지 못하고 부유한다.

배경이 된 수색도 영화 속에서 고유한 지명을 사용한다. 등 장소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는 장률 감독은, 그곳이 가진 경계성에 주목한다. 이전 작품 에 대해 그는 “삶과 죽음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된 도시”라고 말했다. 의 장소, 수색은 높은 빌딩과 아파트로 가득 찬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와 철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장률 감독은 제21회 부산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던 발표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두 동네의 상반된 표정에 대해 말했다. 실제 디지털미디어시티에 거주하는 감독은 그곳에서 첨단산업 구역에 사는 사람들의 ‘준비된’ 표정을 마주친다면 수색에서는 생기를 접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감독은 수색을 두고 “도무지 컬러로 생각나지 않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매끈한 디지털미디어시티가 무표정한 도시라면, 수색은 사람의 온기는 있어도 너무 낡고 오래되고 지쳐 색이 바랜 무채색의 동네 같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수색과 디지털미디어시티 사이의 철길 아래 굴다리가 있다. 10여 분 지하도로를 통과하는 사이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다르다. 영화에서 예리와 세 남자가 영상자료원의 무료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 걷는 길도 이 굴다리다. 무채색 세계에서 무표정의 세계로 넘어온 이들은 매끈한 도시에 스며들지 못하고 쫓기듯 자기들 세계로 돌아간다.

이상하고 온화한 흑백의 꿈

영화는 내내 흑백 영상으로 그려진다. 영화 후반부에 잠시 색이 입혀지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꿈에 불과하다는 뜻일까. 혹은 있는 그대로의 색을 내보이면 너무 비루해서 영화는 내내 흑백의 시각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골목마다 공사장 가림막이 둘러쳐진 동네는 ‘물빛’이라는 오래된 이름이 무색하게 황폐하다. 술 마시고 웃고 떠들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인물들을 색을 입혀서 보면, 옹색한 일상이 너무 초라해 보일 것 같다. 몽롱한 빛을 덧입힌 흑백 영상은 어리숙한 아웃사이더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에서 이들은 단 한 번도 서로 부둥켜안지 않지만, 내내 서로를 보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시 주변부를 헤매다 결국 어느 곳에도 발 딛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존재들은 이처럼 헐겁게 연대하며 꿈결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별다른 음악도 대사도 없이 별안간 끝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긴 뒤척임 끝에 여러 개의 꿈을 이어서 꾼 듯하다. 마지막으로, 뜬금없이 등장하는 여러 카메오들도 이 영화가 현실보다는 꿈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민아, 유연석, 조달환, 가수 강산에, 변호사 송호창 등이 조금 이상하고 뒤숭숭한 꿈결처럼 잠시 나왔다 사라진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