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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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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 대신 ‘개념’ 보드게임 한판?

금수저·흙수저 빗댄 <수저게임> 등 설 연휴에 가족·친구들과 즐길 보드게임을 추천합니다
등록 2016-02-06 01:08 수정 2020-05-03 04:28

주말까지 낀 나흘(대체공휴일 2월10일까지 합치면 닷새)간의 설 연휴. 할 일은 차고 넘친다. 소파에 나무늘보처럼 누워 빈둥빈둥 TV 리모컨을 돌려도, 명절 대목을 맞아 줄줄이 개봉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러 극장 나들이에 나서도, 그동안 쟁여놓고 펴보지 못했던 책 더미에 푹 빠져도 좋다. 어쨌든 연휴니까!
그래도 명절인데 가족끼리 함께할 ‘무언가’도 필요하다. 화투? 포커? 윷놀이? 가족끼리 ‘판돈’ 놓고 얼굴 붉히고 싶지 않다면 보드게임 한판은 어떨까?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개념’ 보드게임이라면 더 좋겠다. 설 연휴에 가족, 친구와 함께 해보면 좋을 보드게임을 소개한다.

1월27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북카페에서 청년들이 모여 2시간 동안 <수저게임>에 열중했다. <수저게임>은 금수저, 흙수저라 불리는 ‘수저 계급론’에 착안한 보드게임이다. 김진수 기자

1월27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북카페에서 청년들이 모여 2시간 동안 <수저게임>에 열중했다. <수저게임>은 금수저, 흙수저라 불리는 ‘수저 계급론’에 착안한 보드게임이다. 김진수 기자

냉정한 현실 반영한 의 규칙

지난 1월27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염리동 골목길에 위치한 북카페 ‘퇴근길 책한잔’에 하나둘 사람이 모여들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뜬 게임 공지를 보고 찾아온 이들이다.

은 요즘 유행하는 금수저, 흙수저 ‘수저 계급론’에 착안해 최서윤 편집장이 기획·제작한 보드게임이다. ‘금수저’는 돈 많고 빽(배경) 좋은 부모를 둔 젊은이, ‘흙수저’는 돈 없고 빽 없는 부모를 둔 젊은이를 뜻한다. 지난해 말 출시된 (3만2천원)은 200세트를 만들었는데 한 달 만에 절반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날 모인 게임 참가자들도 이미 게임을 샀거나, 현장에서 사려고 온 청년들이었다. 부산에 사는 김광욱(29)씨는 서울 여행 중에 친구 박지수(29)씨와 에 참여했다. 최서윤 편집장이 게임 진행을 맡고, 기자까지 모두 7명이 게임을 체험했다. 게임은 최소 5명, 최대 10명까지 참여할 수 있다.

우선 게임이 시작되면 카드를 뽑아 자신의 신분을 정한다. 금수저 2명, 나머지는 모두 흙수저다. 금수저는 집 3채, 칩(게임에서 통용되는 돈) 10개를 받는다. 흙수저는 칩 10개로만 시작한다.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는 설정이다.

모두 10번 판이 돌아가는데, 판이 거듭될수록 금수저는 더 많은 칩을 받게 된다. 1판당 집 2채에서 임대수익(칩 2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면 흙수저는 대학에 진학하면 등록금(칩 1개), 칩 14개를 모아 집을 사기 전까지는 판마다 임대료(칩 1개)를 계속 내야 한다. 3번의 판이 진행될 동안 집을 사지 못한 흙수저는 질병에 걸려 1판을 건너뛰어야 한다는 규칙도 있다. 서글프도록 냉정한 현실을 그대로 빗댄 게임이다.

김광욱씨는 금수저, 기자는 흙수저를 뽑았다. 기자는 대학 등록금을 내는 대신 바로 취업해 돈 버는 길을 선택했다. 첫 번째 임금은 칩 1개다. 대학에 진학한 게임 참가자는 졸업 뒤 더 높은 임금(칩 2개)을 받을 수 있다. 그래봤자 부모에게 물려받은 집을 깔고 앉아 임대료를 받는 금수저에 비할 바 못 된다.

참가자들은 10번의 판마다 법안을 발의한다. ‘최저임금을 칩 4개로 하자’거나 ‘금수저의 부동산 임대료 절반을 세금으로 걷자’ ‘반값 등록금을 도입하자’는 등의 아이디어가 잇따랐다. 금수저와 흙수저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법안에 찬성하거나 반대했다.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법안 발의자는 칩 1개를 잃는다. 참가자들은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려면 흙수저들끼리 힘을 모아야 한다”거나 “금수저의 임대료를 무조건 뺏기보다 임금을 올리는 게 상황을 개선하는 데 효과적이다”와 같은 매우 정치적인 토론을 이어갔다.

게임 중간중간 ‘랜덤카드’도 등장한다. 랜덤카드에 적힌 내용도 지독한 현실 은유다. “취업난: 흙수저는 모두 직업을 잃는다. 단, 면접을 거쳐 금수저는 마음에 드는 흙수저를 특별 채용할 수 있다.” “축 탈조선: 나 ○○으로 이민 간다! 기쁨의 춤을 추고 게임장을 떠나도 좋다. 당신의 헬조선 여정은 끝났다.”

원조는 ‘반(反)자본주의적’

이처럼 정치적인 게임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첫선을 보인 바 있다. 우리나라에 게임으로 알려져 있는 게임의 원본 격인 이다. 게임은 주사위를 던져 자신의 땅에 부동산을 짓고, 그곳을 지나가는 게임 참가자들에게 돈을 받도록 규칙을 정한다. 하지만 애초 에는 부동산을 빌릴 수는 있되 소유할 수는 없고, 빈민을 위한 ‘구제소’를 두도록 하는 등 자본의 탐욕을 제어하는 여러 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사 연대기를 맞춰보는 보드게임 <타임라인: 한국사>의 카드 모양. 코리아보드게임즈 제공

한국사 연대기를 맞춰보는 보드게임 <타임라인: 한국사>의 카드 모양. 코리아보드게임즈 제공

는 초등학교 교사들이 기획에 참여한 역사 게임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보드게임인 에 한국사를 주제로 새옷을 입힌 것이다.

게임 방법은 간단하다. 게임에는 카드 110장이 들어 있다. 카드 한쪽에는 유신헌법, 5·16 쿠데타, 6·29 민주화 선언 등 우리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림으로 묘사돼 있다. 카드 반대쪽 면에는 해당 사건이 일어난 연도가 나온다.

우선 모든 카드를 섞어 연도가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가운데 놓고, 게임 참여자들은 각각 5장씩 카드를 나눠 갖는다. 가운데 카드 더미에서 1장의 카드를 뒤집어 연도를 확인한 다음, 자기 차례가 되면 갖고 있는 카드를 연도 순서에 맞게 그 카드 앞뒤로 늘어놓으면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먼저인지, 윤봉길 ‘도시락 폭탄’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식이다. 연도를 잘 맞춰놓았으면 갖고 있는 카드가 줄어들고, 틀렸으면 다시 새로운 카드를 가져온다. 카드를 가장 먼저 모두 없애는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된다.

중·고등학생 자녀, 조카들과 함께 서로 역사 상식을 뽐내는 한편으로, 최근 뜨거웠던 교과서 국정화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역사를 주제로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협동조합을 주제로 만든 보드게임도 있다. 노동자 협동조합 정보기술(IT) 회사인 ‘엑투스’에서 2013년 내놓은 (LET’s COOP)이다. 게임 참여자들은 수익성, 환경, 윤리성 지수 등을 잘 관리하면서 협동조합을 운영해야 한다.

4~6명이 참여하는 게임의 규칙은 조금 복잡하다. 열두 달마다 회의를 진행하는데, 특정한 의제를 내놓고 다른 조합원들을 설득해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아야 ‘코인’(게임 칩)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2월 총회 때 공연 협동조합을 초청할지, 전시회처럼 총회 장소를 꾸밀지를 의제로 내놓고 선택해야 한다. 이 게임에서 중요한 점은 누군가 이기는 결과가 아니라, 주변을 설득해 협동조합을 잘 운영하는 과정이다.

게임은 게임일 뿐, 싸우지 말자!

2시간여 열띤 토론 속에 진행된 에서 기자는 집 1채와 칩 16개를 가져 ‘은수저’가 됐다. 다른 참가자 2명은 결혼해서 자산을 합치는 방식으로 ‘흙수저’에서 벗어났다. 끝까지 ‘금수저’ 지위를 유지하며 판을 쥐락펴락한 김광욱씨는 “묘하게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이상을 지향하는 게임”이라고 평했다.

명절에 이같은 ‘개념’ 게임을 할 때 주의사항은 없을까?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일 뿐, 정치 성향과 세대 차이로 인해 게임하다가 다투는 것은 금물!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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