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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김치를 어디 날로 먹으려고

고추석박김치 밭 한가운데 미리 묻은 김장독에 층층이 담는 김치… 한밤중 흙을 파헤쳐놓은 걸 알고 김치를 집 안 장독으로 옮겨놓은 날, 도둑은 얼마나 허탈했을까
등록 2015-05-16 14:43 수정 2020-05-03 04:28

봄 늦게 먹을 고추석박김치는 집에서 멀리 뚝 떨어진 산비탈 밭가 나무 그늘에 큰 독 하나를 별도로 묻어 저장합니다. 사람들은 별나다고도 하고 바쁜데 멀리까지 갖다 묻기 귀찮지 않냐고 하지만, 평지 밭에 묻는 것보다 농사지을 때 갈구치지도 않고 나무 그늘이 있어 덜 시어, 수고한 만큼 시원하고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습니다.
늦은 봄에 먹을 김치는 양념이 너무 많이 들어가도 안 되고 너무 적어도 안 되기 때문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써서 만듭니다. 젓국도 넣지 않고 설탕이나 찹쌀풀도 넣지 않습니다. 파, 마늘, 생강에 새우젓만 약간 넣고 소금간을 잘 맞추는 것이 비결입니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한겨레 박미향 기자

미리 묻어놓은 김장독 옆에 시들시들한 풋고추 한 광주리를 씻어 건져다놓습니다. 양념을 많이 하지 않은 배추김치 한 켜 놓고 그 위에 풋고추를 한 바가지 훌훌 뿌립니다. 아버지 두 손으로 잡아도 모자라도록 큰 무를 한 토막 툭 치고 반으로 쭈욱 쪼개 고추 위에 듬성듬성 올려놓습니다. 무쪽마다 간이 될 만큼 소금을 정성스럽게 올리고 그 위에 고춧가루를 훌훌 뿌립니다. 무쪽 간을 잘 맞추는 것이 김치 맛을 좌우합니다. 어머니는 이만큼이면 간이 맞으려나 잘 알 수가 있어야지, 혼잣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소금을 얹습니다. 김장 날라주던 남정네들이 걱정도 하지 마유, 그만하면 간이 딱 맞아유, 딱 맞아, 김장독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너스레를 떱니다.

큰 독이 가득히 차도록 계속 담습니다. 한밤 자고 나면 무쪽이 절여져 항아리에 7부쯤 내려가 있습니다. 절여놓았던 무청과 배추 겉잎으로 소금간을 잘 하여 7부쯤 내려간 독에 우거지를 덮습니다. 동글납작하고 잘생긴 조금 무게가 나가는 강돌을 주워와 우거지 위에 꼭꼭 눌러 얹습니다. 독 주둥이를 비료포 종이로 덮고 고무줄로 꼭꼭 동여매고 항아리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거적때기를 덮고 흙을 수북이 끌어 묻어놓습니다.

비닐하우스도 없고 냉장고도 없던 시절, 풋고추석박김치는 가을 고추 걷을 때 고추를 섶째로 뽑아 그늘진 곳에 잘 보관해야 담글 수 있었습니다. 고추 설거지는 추석 전후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합니다. 김장을 하는 입동까지 풋고추를 보관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장대 여러 개를 위쪽을 묶어 밑을 벌려 세우고, 새끼줄을 총총히 둘러칩니다. 고추 섶을 뿌리째 뽑아 밑에서부터 거꾸로 바짝바짝 붙여 걸어 올라갑니다. 꼭짓점까지 걸어 올리고 맨 위에 짚주저리를 씌웁니다. 그러면 비가 와도 빗물이 들어가지 않고, 속이 비어 있어 바람이 잘 통해 풋고추가 상하지 않고 연하고 시들시들해집니다.

어느 봄날, 밭에 일하러 가시던 아버지가 집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오시는 것이 보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도둑놈이 김치를 훔쳐가려고 흙을 다 파헤치고 열어서 김치를 뜯어 먹어보고 다시 살짝 덮어놓고 갔답니다. 이놈의 도둑놈 남의 김치를 어디 날로 먹으려고 하나. 온 식구가 배추와 무와 풋고추가 노르스름하게 삭아 군침이 도는 김치를 집으로 날라다 겨울 김장 다 먹은 빈 독으로 옮겼습니다. 도둑놈이 밤에 김치 가지러 왔다가 얼마나 허탈하겠나 생각하면 자꾸만 웃음이 납니다. 도둑놈 가져갈 거 조금 남겨놓을 걸 그랬나, 하고 또 웃습니다.

배추김치 쭉쭉 찢어 밥숟가락에 걸쳐 먹고 두툼하고 살찐 무쪽을 절갈(젓가락)에 꿰어 들고 점심을 먹으니 피곤이 싹 풀립니다. 무와 배추, 고추가 삭아서 잘 어우러진 김칫국물에 고로쇠물 타고 달래를 쏭쏭 썰어 넣어서 시원하고 찡한 국물도 함께 먹습니다. 이웃집 연세 많은 할아버지 집에 한 양푼 갖다드렸습니다. 저녁때 할머니가 양푼에 엿 한 반대기 담아 가지고 오셨습니다.

언나어머이, 김치 조금만 더 줘. 김치 때문에 며느리, 시아버지가 싸움이 났어. 오늘 점심은 잘 먹겠다고 좋아하셨는데 먹으려고 보니 며느리와 시누이 셋이 고추석박김치를 다 뜯어 먹고 배추 껍데기만 남겼더랍니다. 그 귀한 것을 어째 어른 한쪽 안 주고 느네끼리 다 먹었나,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나! 할아버지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김치 그릇을 패대기쳐버렸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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