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는 장애인 다큐에 기대하는 것이 없다. 역경도, 눈물도 없다. 그렇다고 화해도 없다. 단지 햇살이 가득한 집으로 당신을 초대할 뿐이다. 말이 없어서 더욱 고요한 세계는 말이 없어서 더욱 서로의 손짓에 집중해야 하고, 서로의 표정에 민감해야 한다.
엄마가 노래방에서 를 부른다. 아빠는 탬버린을 치며 장단을 맞춘다. 아들은 조용히 앉아서 손짓으로 가사를 따라한다. 이렇게 활자로 옮기면 별다른 감흥이 없다. 아들이 왜 손짓을? 정도다. 그러나 여기에 한마디만 더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청각장애’ 엄마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고, 청각장애 아빠가 탬버린을 친다. 아들은 수화로 가사를 따라한다. 딸은 카메라 뒤에서 이들을 찍는다. 이길보라 감독의 사적 다큐 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길 감독은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 청각장애 부모의 비장애인 딸이다. 남동생 이광희씨도 그렇다. 청각장애 부모가 노래를 부르면 수화로 따라하는 세계에서 이들은 살아왔다. 이들에겐 아주 자연스런 일상이 다른 이들에겐 낯설 수도, 불편할 수도 있다. 를 찍은 이유다.
이 땅에서 장애인의 자녀로 산다는 것
는 박수 소리가 ‘짝짝짝’ 하나만 아니란 것에서 시작한다. 손으로 ‘반짝반짝’ 하는 박수의 세계로 다큐는 우리를 이끈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길 감독이 비추는 세계는 장애로 인해 슬프고 불편한 세계가 아니다. 여전히 장애를 그런 편견에 가두는 세상을 향해 ‘반짝이는’ 다른 문화가 있음을 알리려 한다. 이길 감독의 사적 다큐 는 청각장애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영상이자 코다들의 성장담이다. 무엇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청각장애인 부모의 삶에 바치는 딸의 조용한 헌사다.
원래는 엄마·아빠의 얘기만 하려고 했다. 러시아 무용수를 닮은 엄마와 청각장애인 축구대표를 지낸 아빠의 얘기였다. 첫딸인 보라를 낳으면서 부딪히기 시작한 침묵의 세계와 말의 세계, 교과서 없는 육아의 고충, 경제위기를 겪으며 “소금을 뿌려도 죽지 않는 독한 벌레”로 단련된 이야기…. 무엇보다 “견고하고 완전한” 침묵의 세계를 소개하는 다큐였다. 영화의 중간중간에 손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수화 장면에선 시각적인 세계가 시적인 세계가 되는 성취에 이른다. “엄마·아빠의 미세한 근육과 직관적인 문장은 침묵을 기반으로 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딸이 보여주고 싶었던 풍부한 표정과 은은한 미소는 80분의 다큐가 끝난 다음에 강한 잔상으로 남는다.
그러나 결국엔 통역이 필요했다. 침묵의 세계와 음성의 세계 사이에서 살아온 감독의 얘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코다인 감독과 동생은 장애인의 자녀로 살기를 강권당했다. 친구와 싸워도, 공부를 잘해도 그들에겐 ‘장애인의 자녀’라는 지울 수 없는 배경이 있었다. 남매는 더더욱 “착하게 빨리 자라야” 했고, 감독은 “누구보다 빨리 어른이 되었다”고 돌이킨다. 그러나 눈물 젖은 회상이 아니다. 단지 ‘착한 장애인 자녀들’ 콤플렉스를 강권한 세상에 대해 경험을 돌이켜 말할 뿐이다. 오히려 공부 잘하는 아이였던 감독은 고등학교 1학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동남아 배낭여행을 떠났다. 길에서 세상을 배우는 ‘로드 스쿨러’ 이길 감독은 부모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나 자체로 오롯할 수 있었다”고 돌이킨다. 침묵의 세계와 음성의 세계에서 이중언어를 구사했던 감독의 경험은 낯선 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힘이 되었다.
6월2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다른 세계를 경험한 이들은 드문 통역자가 된다. 보편적 세계와 특수한 세계 사이의 충실한 통역자. 엄마를 따라서 입으로 옹알이를 하는 대신에 손으로 옹알이를 했던 감독은 언제나 ‘이중문화’의 세계를 살았다. 부모가 사는 침묵의 세계와 외부에 있는 언어의 세계 사이에서 말이다. “9살에 나는 은행에 전화를 해 우리 집 빚이 얼마나 있는지… (부모를 대신해) 묻고 통역을 해야만 했다.” 그런 통역의 고충은 에서 아버지의 소원인 전원주택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동생이 하는 역할을 통해 드러난다. 한 손으로 수화를 하면서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드는 ‘동시통역’의 세계를 그들은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감독의 특수성은 오히려 가능성이 되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해외 사례를 보면서 코다들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이미 는 그 자체로 훌륭한 통역의 매체가 됐다. 이길 감독은 다큐에 대해 “부모님을 보는 나의 일기장”이라며 “엄마·아빠 얘기를 하려다 나를 발견한 거니까”라고 말했다. 는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 타인의 세계를 확장하는,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의미에 이른다. 이 다큐는 5월31일, 6월2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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