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영등포역을 출발해 철길을 달리는 기차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른다. 멀리 보이는 고층 아파트, 그 가운데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 피아노 소리가 ‘쿵’ 하고 귓가를 때린다. 기차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잠시 뒤엉키더니 금세 하나의 ‘소리’로 묶인다. 기차가 갈라놓은 바람이 옥상 위로 ‘휙’ 하고 불어온다.
<font color="#638F03">#2. 문래동1가 구로세무소 옆 삼거리 골목</font>‘지이이잉’ 철근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간다. 하나의 음표가 날카로운 기계 위로 쭉 미끄러진다. 골목 옆에 오래된 낡은 간판이 흔들리는 듯하다. 기계음 사이로 피아노 음표가 뚝 떨어지고 현악기 소리가 지그시 흘러나온다. 기계음은 피아노와 현악기 사이 어딘가에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 나면 골목이 소리로 꽉 찬 공간으로 변한다.
<font color="#638F03"> #3. 영등포등기소 앞 버스 정류장</font>중앙차선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 끝에 서면 버스나 자동차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스테레오처럼 양쪽에서 자동차 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액셀 밟는 소리, 버스 문 열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여기에 낡은 LP판 소리와 몇 가지 자극적인 사운드를 뒤섞은 음악이 덧입혀지고 나면 버스 정류장의 시간은 이상하게도 천천히 흘러간다.
‘장소 특정적 공공미술 프로젝트’시각예술가 장민승과 음악가 정재일이 함께하는 장소 특정적 공공미술 프로젝트 (Spheres)의 현장이다. 미술관 화이트큐브에서 나와 더 많은 대중과 함께하는 게 공공미술이라면, 장소 특정적 공공미술은 그중에서도 특정한 지역의 지형과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한 공공미술을 가리킨다. 그 지역에서 거주하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에 관한 공공미술은 ‘커뮤니티 아트’로 분류된다. 장민승과 정재일이 5월11일부터 7월10일까지 진행할 장소 특정적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장소로 선택한 곳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창작공간 문래예술공장의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 ‘맵’(MAP·Mullae Art Plus)의 하나로 시작됐다.
는 시각예술적 개념을 설명하기보다 동선을 보여주면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관람객이 문래동에 도착하면 스마트폰으로 앱스토어에 접속해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는다. 애플리케이션 속 지도를 따라 걷다 보면 6개 장소에 각각 QR(Quick Response) 코드가 붙어 있다. 스마트폰으로 QR 코드를 인식하면 그 장소에 맞는 음악이 자동으로 스마트폰에 내려받아진다. 그리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감상한다. 단순하게는 ‘길거리 배경음악’이고 조금 더 복잡하게는 ‘특정한 공간과 그 공간에 맞게 만들어진 음악을 통해 시각·청각·지각 등 공감각적 체험을 하는 것’이 바로 다.
스마트폰과 애플리케이션 때문에 자칫 기술을 기반으로 한 시각예술 체험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 프로젝트에서 스마트폰과 애플리케이션은 단지 특정 공간에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프로젝트는 아날로그적 방식을 따랐다.
조각을 전공하고 영화음악가이자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지난해 두 차례 사진전을 열며 시각예술로 영역을 넓힌 장민승은,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난해 8월부터 문래동의 역사와 지역의 여러 특징 등 자료를 모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철공소가 몰려 있는 문래동은 작은 공장이 많았던 예전 서울의 모습과 아파트 등 개발된 서울의 모습을 모두 가진 곳”이라며 “이 장소만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문래동 구석구석을 다니며 장소의 시각적 요소들을 찾아냈고, 현장의 온갖 소리를 녹음했다.
그렇게 수집한 문래동에 관한 수많은 자료와 정보, 소리를 놓고 음악가인 정재일과 마주 앉았다. 다양한 악기 연주로 ‘천재소년’이라고 불렸던 정재일은 서양 고전음악과 한국 전통음악 등을 아우르는 몇 안 되는 음악가다. 영화음악 작업 등을 통해 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정재일과 장민승은 문래동이라는 공간을 드러내면서도 관람객 모두 각자 오래된 기억을 소환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음악과 시각예술의 언어를 모두 아는 장민승이 일종의 통역자로, 음악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정재일이 작곡가로 만났기에 가능했다. 정재일뿐 아니라 DJ 소울스케이프(박민준)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음악 6곡 중 2곡이 그의 작품이다. 6곡 모두 시각예술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어렵거나 난해한 음악이 아니다. 감정선과 귀를 잡아끌 만큼 드라마틱하고 몰입도가 강한 음악이다. 그래서 속 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장민승은 “음악은 미술과 다르게 사전 지식이 전혀 없어도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느낄 수 있는 민주적인 예술”이라며 “공공미술이라고 해서 꼭 시각적인 무언가를 덧붙이기보다 거꾸로 그런 것들은 제외하고, 오로지 음악만을 매개로 새로운 시각·공간적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또 “지정된 공간에서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듣는 가장 개인적인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프로젝트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라며 “그 누구의 안내나 정해진 규칙 없이 스마트폰을 들고 골목을 걸으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스마트폰을 들고 저녁에 가자를 경험하기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게 몇 가지 있다. 준비물은 90MB의 여유 저장 공간을 가진 스마트폰과 애플리케이션(애플 앱스토어나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내려받기 가능), 또 스테레오 헤드폰이나 이어폰이다. QR 코드가 붙은 곳은 모두 6곳이며, 2km 정도 되는 6곳을 모두 돌면 1시간10분 남짓한 시간이 소요된다. 시간대는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해가 진 저녁이나 밤 시간대가 적당하다. 낮에는 사람들이 많아 해당 공간만의 소리를 온전히 느끼기 어렵고, 밤의 골목길에 가로등이 켜지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요소로 공간에 배치된다. 자세한 사항은 누리집(www.spheres.kr)을 참고하면 된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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