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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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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예술적인 삼각관계

슈만-클라라-브람스,

파국 대신 배려와 자기절제로 빚은 예술적 연대를 그린 영화 <클라라>
등록 2010-12-15 15:17 수정 2020-05-03 04:26

는 독일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이자 요하네스 브람스의 연인이던 클라라를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를 그린 영화다. 여기엔 두 가지 오해 섞인 질문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첫째, 그녀는 두 남성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뮤즈’인가. 둘째, 삼각관계를 맺었다면 그녀는 팜므파탈인가. 는 두 가지 오해를 보기 좋게 따돌린다. 그녀를 뮤즈나 팜므파탈이 아닌 당당한 여성 예술가로 그려낸다. 세 사람의 관계 역시 흔한 불륜이 아니라, 배려와 자기절제로 빚은 예술적 연대로 그린다. 여성주체가 중심이 된 참 바람직한 삼각관계이다.

클라라

클라라

 

1. ‘남성 예술가-여성 뮤즈’의 도식을 집어치워라!

예술사에서 ‘남성 예술가-여성 뮤즈’의 도식은 유구한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오직 남성 예술가이며, 여성은 남성 예술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비인격적 존재로 대상화된다. 역사상 여성 예술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남성 예술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빛을 잃거나, 역사나 드라마에 의해 더 나쁘게 재현됨으로써 주체로서의 지위를 잃고 사장된다. 예를 들어보자. 은 촉망받던 여성 예술가가 남성 예술가와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자아를 잠식당했는지 잘 보여준다. 로댕의 제자이자 모델, 연인일 뿐 자신의 예술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몸부림을 친다. 의 열정적인 여성 예술가 프리다 칼로 역시 남성 예술가와 결혼하면서 인생을 저당 잡힌다. 영화는 그녀가 남편의 바람기로 괴로워하다가 다른 관계로 결핍을 해소하려는 것을 보여줄 뿐, 예술가로서 자아를 몰수당한 그녀의 고민은 담지 않는다. 영화 속 그녀의 그림에는 자신의 육체를 응시하는 실존적 고민이 녹아 있지만, 영화의 서사는 오직 난봉꾼 남편을 둔 여자의 고통에 주목하다 마지막엔 “그래도 난 그를 사랑한082다”는 말로 봉합해버린다. 는 더 나쁘다. 등단 뒤 곧장 유명 시인과 결혼한 실비아는 생계와 가사를 짊어진 채 시를 쓰지 못한다. 영화에서 실비아는 그녀의 의부증으로 남편이 집을 나간 뒤 시를 좀 쓰는 것 같다가, 남편과의 재결합 시도가 거절되자 자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를 보아선 그녀가 언제 무슨 시를 썼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며, 오직 ‘사랑과 전쟁-의부증 편’이 남을 뿐이다.

를 통해 여성 예술가들의 실패와 실제보다 더 악의적인 재현에 넌더리가 난 관객의 입장에서 ‘슈만과 브람스가 사랑한 뮤즈’라는 의 표제는 우려스러웠다. 더욱이 (1983)에서는 영재로 키워진 순진무구한 클라라가 가난하고 방탕한 예술가 슈만을 만나자 이를 반대한 아버지에 맞서 6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뒤 자신의 예술 활동에만 전념하는 남편 때문에 그녀의 재능이 사장되는 것처럼 묘사된 것을 떠올리면, 그런 우려가 더 굳어졌다.

그러나 우려와 다르게 는 그녀를 성공한 여성 예술가로 재현해냈다. 영화는 슈만과 연주여행을 다니는 클라라로 시작해, 위엄 있는 그녀의 연주 장면으로 이어진다. 연주가 끝나자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작곡가 슈만”을 불러내 무대 인사를 시킨다. 그녀는 당시의 편견을 불식시키며, 정신질환을 앓는 슈만을 대신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브람스와의 첫 만남 역시 그녀가 남편을 끌고 선술집에 옴으로써 이루어지며, 집에 찾아온 브람스에게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건네는 것도 그녀다. 그녀는 집안에서도 무대에서도 언제나 중심에 있으며, 영화는 그녀를 바라보는 슈만과 브람스의 시선을 교차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남편을 잃었지만 예술가로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는 클라라의 연주 장면과, 그것을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브람스의 시선을 롱숏으로 잡는다. 그녀는 뛰어난 예술가이자 열정적인 사랑을 품은 여성이었다. 또한 예닐곱 명의 아이를 낳고 집안을 건사하는 모성적 존재였다.

 

2. 너 죽고 나 죽는 파국적 삼각관계는 이제 그만!

슈만과 클라라의 집에 젊은 브람스가 찾아오고, 이들이 한집에 살면서 브람스가 클라라를 사모하게 된다. 이 구도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오직 ‘필름 누아르’적 파국뿐이라면 우리 뇌가 얼마나 제한적 관계에 길들여졌는지 반성할 일이다. 브람스는 가족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 슈만이 발굴한 후계자이자, 14살 연상의 클라라에게는 열정과 예술을 나눌 친구이고, 아이들에게는 잘 놀아주는 삼촌이다. 브람스는 슈만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난 뒤에도 슈만의 입원으로 가족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송금해준다. 클라라에게 슈만의 면회를 독려하고, 슈만이 죽은 뒤 클라라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클라라가 슈만의 작품을 편집하고 전파하는 것을 돕는다. 브람스는 슈만의 예술 세계와 인적 자원을 승계한 후계자이자, 클라라의 중년 이후 40년을 지탱해준 예술적 동지이다. 물론 이들에게 성적 긴장과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살의 브람스가 클라라의 발가락을 만질 때, 클라라는 여유 있게 물리친다. 슈만이 둘의 관계를 의심하며 흉포해질 때도 그녀는 남편의 불안을 달랜다. 슈만이 죽고 브람스와 누웠을 때, 그녀는 브람스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거나 내숭을 떨거나 신경질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언제나 욕망 앞에 당당하고 상대에게 진실하다. 브람스가 “당신을 뺀 모든 여자들과 자겠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관계를 오래 지속하려는 자기절제와 배려의 방책이다. 이들은 리비도를 소진시키지 않고 상생적 관계를 꾸려나간다. 브람스는 평생 독신으로 그녀와 교감하다, 클라라 사후 1년 만에 뒤따라간다.

를 과 비교해보면 교훈이 더 뚜렷해진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역시 톨스토이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재산도, 사랑도, 명예도 잃는다. 사랑이 사적 소유관계에 갇힐 때, 집착과 질투만이 남는다. 를 통해 사적 소유관계에 갇히지 않은 사랑을 대안적으로 사유해볼 만하다. ‘이제 모든 것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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