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본 고우영의 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하나. 간계에 빠져 가족을 모두 잃고 막내아들 하나만이 말을 타고 도망치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반드시 돌아와 원수를 갚겠다며 참혹한 죽음을 맞은 형제들에게 약속한다. 그런데 그 위로 죽은 형제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은 껄껄 웃으며 말한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라며. 한마디로 이승과 저승의 가치관은 전혀 다르다는 것일 게다. 속세의 희로애락을 초월한 저 세상이라면. 그러나 공포영화에서는 생사를 넘나든 복수가 쉽게도 이루어진다. 원혼이란 건 저 세상에 가서도 여전히 한을 품고 이승의 누군가를 해치는 존재다. 간혹 방향이 어긋나기도 하고, 무차별적으로도 이루어지기도 하면서 원혼은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죽은 자는 왜, 그들을 보는 것일까?
그렇다면 영화 의 수지 새먼은 어떨까? 14살의 소녀 수지는 이웃집의 연쇄 살인마 조지 하비에게 강간 살해당한다. 하비는 잡히지 않았고, 가족은 슬픔과 분노에 침식돼 서서히 뒤틀려간다. 그것을 바라보는 수지는, 어떤 마음일까. 피터 잭슨 감독이 오랜만에 만든 는 가슴 아픈 판타지다. 죽은 자는 계속해서 이승을 지켜보고, 살아남은 자는 그들의 인생을 계속 밀어가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껴안고.
살해당한 소녀가 내세에서 가족을 지켜본다는 이야기는, 스펙터클의 파노라마를 선사했던 과 의 피터 잭슨에게 너무 말랑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필모그래피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1994)은 와 언뜻 유사해 보인다. 소녀와 범죄, 그리고 판타지. 다만 소재가 비슷한 것 외에는 의 내면은 과 전혀 다르다. 두 소녀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의 판타지를 방해하는 엄마·어른을 살해하는 에서도 화자는 역시 소녀가 된다. 소녀들은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것은 몽상이고, 판타지다. 판타지에서 살아가는 순간은 행복하지만, 그들이 발을 디딘 곳은 현실이었다.
의 수지가 보는 것은, 판타지가 아니라 그 끔찍한 현실이다. 현실에서 도망쳐 판타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갇혀 오로지 ‘사실’을 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수지다. 그렇다면 수지는 왜, 그들을 보는 것일까?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그저 안타까워서? 아님 그들을 결코 잊을 수 없어서? 의 핵심은, 수지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다. 수지의 눈을 통해서 본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그 점에서 피터 잭슨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수지가 없어도, 아니 오히려 수지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들의 인내와 성장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 극히 어려워졌다.
원작 소설에 피터 잭슨이 추가한 것은, 내세의 판타지다.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수지가 단지 화자로만 존재한다면 ‘영상’의 힘이 약해진다. 그래서 피터 잭슨은 관객을 사로잡을 혹은 자신을 위한 스펙터클을, 아직 우리가 본 적 없는 내세의 풍경이라며 창조해낸다. 피터 잭슨다운 해법이고, 피터 잭슨의 장기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선택이다. 하지만 피터 잭슨이 빚어낸 내세는, 저차원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의 내세는, 그저 수지의 내면을 반영할 뿐이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고 수지가 느끼는 순간 병 속에 든 범선들이 해안가로 들이닥쳐 파괴되고, 수지가 절망하는 순간 숲은 죽어가고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을 때, 수지 역시 괴로워했다고? 그래서 수지의 마음이 전해져 결국 살인자는 벌을 받은 것이라고? 그건 내세가 아니고, 마음일 뿐이다.
수지의 마음, 식상한 분노와 외로움만의 깨달음은, 결코 피터 잭슨이 창조한 이야기와 영상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는다. 즉 내세의 판타지는, 영화 속에서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작용을 한다. 에서 중요한 것은 내세가 아니다. 다시 한번, 수지는 왜 그들을 지켜보는 것일까? 수지를 잃은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수지의 가족만이 아니다. 살인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수지처럼 그들을 ‘보기’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알게 된다. 딸을 떠나보내지 못해 결국 자신이 떠나버린 수지의 엄마처럼, 때로는 반드시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깨달음도 있다는 것을. 는 그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고, 고통을 견디고 다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피터 잭슨은 그 진정한 의미를 스스로 외면해버린다. 그리고 판타지와 소녀의 억지스러운 깨달음으로 치환해버린다. 깨닫는 것은 소녀가 아니다. 소녀를 떠나보내고, 그녀가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남은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피터 잭슨이 또 하나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수지의 마음이다. 참혹한 고통으로 세상을 떠난 수지의 마음이 어땠을 것인지 피터 잭슨은 헤아리지 못한다. 식상한 분노와 외로움만이 겉돌고 있다. 는 수지가 오로지 지켜보는 화자로서만 존재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녀의 마음과 가족의 성장도 그대로 투영됐을 것이다. 수지의 내세가 거대한 판타지로 그려질 때마다, 이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익숙해진다. 오로지 지켜보는 것. 이승은 이승대로, 내세는 내세대로, 보기만 하는 것. 그것이 아마 세상의 법칙일 것이다. 가 지켰어야 할.
김봉석 영화평론가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승환 구미 콘서트 취소 후폭풍…“김장호 시장은 사과하고 사퇴하라”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
‘내란 비선’ 노상원 수첩에 정치인·언론인 ‘사살’ 표현 있었다
이승환 “‘정치 언행 않겠다’ 서약 거부, 구미 공연 취소 통보 진짜 이유”
윤상현, 트랙터 시위에 “몽둥이가 답”...전농 “망발”
12월 24일 한겨레 그림판
[속보] 헌재 “윤석열 통보서 받은 걸로 간주…27일 탄핵심판 개시”
계엄의 밤, 사라진 이장우 대전시장의 11시간…“집사람과 밤새워”
[단독] 윤석열, 3월 말 “조만간 계엄”…국방장관·국정원장·경호처장에 밝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