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에서 ‘PD집필제’를 한다고 한다. 거기에 무슨 대단한 철학이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작가들이 하던 일을 PD에게 떠넘겨 비용을 절약하자는 생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PD의 다른 일들을 줄여줄 것 같지도 않다. PD집필제의 목적은 ‘PD라면 모름지기 집필 능력까지 갖춰야 한다’는 철학의 실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비용 절약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두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떠맡을 경우, 비용은 절약될지 모르나 당연히 거기에는 손실이 따를 수밖에 없다. 과거에 작가들이 하던 조사·연구·집필의 업무를 PD에게 떠넘길 경우, 당연히 시간적 제약이나 전문성의 부족으로 방송의 질적 수준이 크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방송의 질적 수준 하락은 불보듯 뻔해방송작가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실제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해본 경험에 따르면, 인터뷰의 수준은 연출이나 진행 이전에 우선 방송 원고에 의해 결정된다. 아침 방송을 마칠 때마다 하는 세리머니가 있다. 스튜디오를 나서면서 “수고했습니다!”라고 외치며, 방송 원고를 휴지통에 집어넣는 것이다. 이 방송 원고의 신세는 곧 방송작가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나중에 작가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듣고서 크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들이 하는 일의 전문성에 비해서 대우는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이다. 방송의 수준을 높이려면, 일단 작가들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대우부터 제대로 해줘야 한다.
방송 원고는 디지털 글쓰기의 상징이다. 디지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텍스트는 눈에 보이지 않은 영역으로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 이미지와 사운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침전된 텍스트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보는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도 알고 보면 문자-숫자 코드로 프로그래밍한 이미지, 다시 말하면 텍스트로 그린 그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로 완성된 뒤에 스스로 사라져버리는 방송 원고야말로 디지털 글쓰기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듣자 하니, 방송작가에 대한 대우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는 한국방송에서 작가들의 임금을 10~20%가량 감축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들리는 소리가 아예 이참에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이 황당한 조처의 배후에는 TV와 라디오에서 방송 원고가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무지가 깔려 있다. 즉, 방송 원고를 작성하기까지의 작업 자체가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지 않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PD들에게 그냥 떠넘겨도 무방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일 게다.
이미지와 사운드로 나가는 방송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텍스트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특히 공영방송의 수준을 결정하는 다큐나 시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에는 전문적인 텍스트 능력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시대의 일반적 추세,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방송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방송작가라는 직종 자체를 없애겠다? 이 해괴한 발상이 하필 공영방송사에서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공영방송에서 제일 우선시해야 할 가치는 국가의 문화적 품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민영방송이라면 시장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게 당연할지 몰라도, 공영방송이라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해괴한 발상이 하필 공영방송에서 나오다니어차피 21세기는 문화 콘텐츠의 시대라고 하지 않던가. 망이 깔렸으면 그 위로 콘텐츠가 흘러야 한다. 한국 문화의 고질적 문제가 바로 콘텐츠의 고갈이 아니던가. 콘텐츠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콘텐츠의 생산자들을 마치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유휴인력처럼 취급해서는 이른바 ‘경쟁력’이라는 것도 가질 수 없다. 방송의 수준을 높이려면 방송작가의 일을 없앨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면서 방송 전문인력으로 양성할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한국방송 방송작가들의 싸움에 열렬한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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