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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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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색칠하는 광속도

등록 2008-05-23 00:00 수정 2020-05-03 04:25

‘상상한 것 그 이상’의 질주를 보여주는 만화 같은 영화, 워쇼스키 형제의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또 다시 만난 “당신의 상상, 그 이상을 보게 될 것.” 이 광고문구의 원조가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이니, 그들의 차기작 의 이 ‘오버스러운’ 광고 문구는 제대로 된 ‘원조’를 찾아달라는 외침으로 들린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의 홍보사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카피로 영화를 소개했다. 전편인 의 흥행으로 속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상황에서 이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문구는 영화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는 지난 5년 동안 각종 광고와 안내글에 마구잡이로 쓰이면서 이제는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수준으로 닳고 닳았다. 사람들 역시 그런 말에 호기심을 느낄 정도의 순진함을 벗어던진 지 오래다. 원조라도 이 정도면 진부해진다. ‘원조’ ‘진짜 원조’ ‘진짜진짜 원조’를 달고 도열한 감자탕집 앞에서 헷갈리는 손님처럼.

머릿속이 온통 레이싱 생각뿐인 아이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질주하는 차에 몸을 맡기고 있노라면 철 지난 홍보문구가 주는 ‘찝찝함’은 하나둘 사라진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랄까? 물론 롤러코스터에 앉아 거창한 고민을 하지 않듯,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찔한 레이싱과 속도감을 정신없이 즐겨주는 것이 좋다. 레이싱 트랙을 활공하다시피 하는 매끈한 몸체의 자동차들과 화려한 볼거리에서 를 통해 다양한 영상을 선보인 워쇼스키 형제의 내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더욱이 주인공인 스피드 레이서(에밀 허시)의 동반자이자 라이벌로 등장하는 ‘토고칸 모터스’의 태조 토코칸을 연기한 가수 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비중 있는 역에 어울리지 않게 몇 마디 안 되는 영어 대사와 대체로 인상만 쓰고 있는 표정 연기는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아온 작품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기특한 도전이다.

는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요시다 다쓰오의 라는 만화책 시리즈를 일본 다쓰노코 제작사가 TV로 옮긴 는 1967년 일본에서 처음 방송되면서 인기를 누렸다. 같은 해 미국으로 수출된 이 애니메이션은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뒤 2000년 초반까지 다양한 버전이 전파를 타면서 40여 년간 미국 10대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1976년 옛 동양방송(TBC)에서 라는 제목으로 방송했고, 1997년 SBS가 라는 제목의 새 버전을 방영하기도 했다.

영화는 레이싱 경기 전 대기실에 앉아 있는 스피드 레이서를 비추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레이싱 카들의 질주. 그 현란함과 속도감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1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 아이가 신고 있는 운동화를 화면 가득 비추면서 브레이크를 밟는다. 교실 의자에 앉아 정신 사납게 다리를 떨고 있는 아이. 그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스피드 레이서다. 그의 관심사를 대변이라도 하듯, 화면 가득 채워진 운동화에는 꽁무니에서 불을 뿜으며 질주하는 자동차가 그려져 있다. 스피드는 같은 반에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노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다. 머릿속에는 온통 레이싱과 자동차에 대한 생각뿐. 시험 답안지에는 당시 최고의 레이서인 형을 응원하는 문구로 도배질을 해놓고,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형이 운전하는 레이싱 카를 타기 위해 교실 문을 나선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문제아로 낙인찍혔지만 어느 세상이나 ‘미쳐야(狂) 미치(及)’는 것이다. 유년 시절 그토록 레이싱과 자동차에 미쳐 있던 스피드는 현재 벌어지는 레이싱 경주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무협영화와 닮은 성장영화

영화는 초반부 레이싱을 벌이고 있는 스피드의 모습과 그의 유년 시절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그러면서 ‘레이서 모터스’를 세운 아버지 팝스 레이서(존 굿맨)와 온화하고 다정한 어머니 맘 레이서(수전 서랜던), 귀여운 여자 친구인 트릭시(크리스티나 리치), 그리고 천부적인 레이싱 재능을 지닌 형 렉스 레이서(스콧 포터)와 그의 죽음을 관객에게 속도감 있게 설명한다.

이야기의 얼개는 간단하다. 아버지가 직접 설계한 레이싱 카 마하5를 타고 형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레이싱에 모든 것을 건 스피드. 그는 대기업 회장인 로열튼(로저 앨럼)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면서 형의 죽음과 레이싱 경주의 추악한 비밀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로열튼의 보복과 죽음의 경주. 는 스피드의 성장영화이면서 동시에 가족영화다. 그리고 그 패턴은 무협영화와 닮았다. 형 렉스와 레이서 엑스(매튜 폭스)의 도움으로 당대 최고 레이서로 변모해가면서 가족을 곤경에 빠트린 사악한 로열튼과 싸워나가는 것. 물론 이같은 설정은 워쇼스키 형제의 전작인 가 조력자 모피어스의 도움으로 ‘요원’들에 맞서 인류를 구원할 ‘그분’으로 커가는 네오의 성장담이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낯이 익다.

그렇지만 감독은 이같은 이야기의 단순성을 영상의 현란함으로 어질어질하게 만든다. 영화 속 레이싱 카들은 아슬아슬한 레이싱 코스 위를 시속 640km에 가까운 속도로 질주한다. 차와 차가 뒤엉키면 360도 회전쯤은 예사로 하고, 초고속 주행을 하다 레이싱 카가 하늘로 튀어올라 공중에서 곡예에 가까운 액션을 선보이기도 한다. 검투사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 싸움을 하듯 자동차 바퀴에서 칼과 방패가 나와 서로 치고받는다. 레이싱 카에 장착된 톱날, 표창, 스피어 후크 같은 숨겨진 무기들이 관객의 시선을 빼앗는다.

배경은 미래, 패션과 색감은 1960년대

배경이 되는 이미지 역시 새롭다. 영화는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패션과 색감은 1960년대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지나치게 밝은 톤으로 강조돼 있다. 오렌지색, 녹색, 자줏빛, 분홍색 등으로 표현된 이미지들은 마치 팝아트 작품을 마주 대하는 느낌이다. 미래도, 과거도 아닌 어중간한 세상. 그래서 낯설고 또 낯설다. 감독은 그런 낯선 세상을, 미래 세계에 복고풍 이미지를 뒤집어씌워 손쉽게 구현했다.

워쇼스키 형제의 전작 에는 실재론과 관념론,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가상과 현실, 복제와 원본 등 온갖 철학적 담론이 난무했다. 그 심오함과 진지함에 매료된 관객이라면 이 만화 같은 영화가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하지만 “좀더 넓은 층의 관객과 소통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워쇼스키 형제의 소망대로 는 어린 시절 에 열광했던 30·40대에게 향수를, 그렇지 않은 10·20대 관객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안겨줄 것이다. 12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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