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쫄깃한 대삿발의 ‘김해곤표’는 어디 가고 회 뜨는 소리만 난무하누나
▣ 심영섭 영화평론가
복도. 깊숙한 터널의 끝. 네 사내가 방망이를 들고 비장한 발걸음을 한발 한발 옮기고 있다. 그것은 어둠의 길, 끝없는 길. 이윽고 화면은 피와 살을 흩뿌리며 카지노의 판돈을 탈취하려는 네 사내의 발길질과 욕설로 자욱해진다. 방망이가 춤추고, 푹 박히는 사시미 칼날이 손끝에서 만져지는 세상. 도주, 추적, 배신과 파멸이 난무하는 그곳.
은 과거 나 이 그러했듯, 멋진 남자와 거친 남자의 가변 차선 속에 몸을 묻고, 끝없이 삶을 조각내갔던 사내들의 이야기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를 믿어서도 안 되며, 여자는 남자를 버리는 비정한 세상의 난투극. 사실 극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다. 영화의 감독으로 김해곤이란 이름 석 자를 단 이상, 스크린에 몸으로 한 세상을 기어 넘기는 사내들, 순정과 육체를 동시에 파는 여자들, 세상에 대한 구역질로 거침없이 내뱉는 질펀한 육담이 난무하리라는 것을.
그래도 김해곤 감독에게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카드깡을 막으며 지새웠던 지난날의 삶에서 육화한 ‘진흙탕 생’에 대한 동물적인 ‘감’ 때문이다. 그가 각본을 썼던 이나 연기를 맡았던 에는 알싸한 남성 판타지 대신 생활에 절어버린 사내들의 땀냄새가 물씬했다. 감독 데뷔를 한 에서는 가족조차도 꿈일 수밖에 없는 호스테스와 날건달의 순정담을 통해, 그 빌어먹을 신분 차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동네에서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 심지어 상류층과 중류층의 계급 차보다 더 엄혹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이야기는 통속적이지만, 대중에게 통하는 통속성은 부족한 그 절묘한 부정교합. 그 가운데 주류를 빗겨가는 변방 영화의 향기와 쫄깃한 대삿발이 ‘김해곤표’가 아니던가.
인물과 액션은 있되 미학은 없네
그럼에도 은 장엄한 운명의 길을 직선으로 추락하는 갱스터 장르의 쾌감 대신, 어수선하고 수선스런 마초들의 자멸극으로 2시간을 채운다. 이 영화에는 스토리는 있되 플롯이 없고, 인물은 있되 캐릭터가 없으며, 액션은 있되 액션의 미학이 없다.
권상우가 맡은 철중은 가족에 대한 부채감과 책임감으로 물질적 욕망에 매달리며, 한없이 세상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동물적 캐릭터이지만, 시종일관 욕을 입에 달고 다니며 툭하면 핏대질에 삿대질에 발길질만을 할 뿐이다. 송승헌이 분한 김우민은 철중의 배신으로 상처 입는 내면을 감추며 밤거리를 배회하는 고독하고 부박한 사내이건만, 막판에 가면 그마저 마구 칼을 휘두르는 마성을 드러낸다(더구나 주인공의 1인칭 화법의 내레이션은 화면과 겉돈다).
김해곤 감독은 캐릭터와 줄거리 모두의 측면에서 관객에게 말을 걸고 소통하고 설득하는 데 실패한 듯 보인다. 대체 세상이 지옥이라면, 이들이 물질적 갈망 외에 이토록 처절하게 서로를 배신해야 하는 연유는 무엇이며, 무엇보다 이들의 우정이 얼마나 뜨거웠기에 지금 벌어지는 배신의 화마가 그토록 쓰라린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은 툭하면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불법 유턴을 하는 범법자들과 마약을 상용하고 감정 과잉의 퇴행을 벌이는 미숙아들과 어떤 식의 인간적 관계도 없이 보스의 감정적 쓰레받기가 되는 조폭 똘마니들의 집합소와 다름없다. 면도날과 사시미 칼의 회 뜨는 소리 난무하건만, 배우들의 이름과 개성은 지워져버린다.
여성관객에게 ‘무서운’ 농담들
행간에서 느껴지는 감독의 이데올로기적 폭력도 참기 힘들었다. 또 다른 조폭 도완(김인권)은 마약으로 육신과 넋이 망가진 채, 미진이라는 옛 여인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어한다. 그는 떠나려는 애인의 얼굴에 면도날을 긋고, 그 집착을 사랑이라 강변한다. 송승헌조차 미진에게 “도완이가 포기하기 전까지 넌 도완이 곁을 못 떠나”라고 내뱉는가 하면, 권상우는 여동생에게 “이혼 못해. 내가 안 시켜”라고 못을 박는다.
여성 캐릭터를 자유 의지조차 없는 물건처럼 그려내고, 남성 캐릭터의 마초 근성에 대한 각주 정도로 생각하는 감독의 태도는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영화 속 조폭들이 농담 따먹기를 하며 “너 사기, 도둑질, 폭행, 강간 다 해봤잖아”라고 하자 ‘그래도 강간은 안 했어. 강간 미수야” 하는 게 유머스런 대사로 삽입될 만큼, 감독은 지독히도 여성 관객에게는 둔감함을 드러낸다.
은 장르의 관성을 타고, 한류 스타를 활용하는 기획력과 한국적 액션을 퍼덕거리는 날것으로 표현해보려는 연출 의도가 도드라져 보이지만, 인연과 운명의 끈에 얽혀 파멸해가는 갱스터 장르의 완숙도를 보여주기에는 함량 부족이다. 장엄한 주제의식을 겨냥한 이란 제목은 영화에서 포켓 끝에 걸친 멋진 행커치프가 아니라, 감정 과잉으로 빠져나온 찔찔이 손수건이 돼버렸다. 어지러운 ‘이명’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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