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에서 며느리·아내·친구·엄마 1인 4역인 ‘한자’의 절절한 연기
▣ 이문혁 CJ엔터테인먼트 드라마사업팀 프로듀서
한때, 역대 최고의 보컬리스트 다섯 명을 나름 꼽아본 적이 있었다. 짐 모리슨, 프레디 머큐리, 마이클 잭슨, 조지 마이클 그리고 아직도 가슴이 아련한 우리의 커트, 커트 코베인이 그들. 이런 되도 않은 짓의 기준은? 이 다섯 사람의 노래는 최소한 이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어야 맛이 난다는 것. 이들의 성대를 울리지 않고 불리는 이들의 노래는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다른 음악처럼 들린다는 얘기다.
영화 를 보고 비슷한 놀이를 했다. 김윤석의 역할을 혹시 송강호가 연기했다면? 하정우보다 더 소름 끼칠 수 있는 배우는? 자신이 밤을 새워서 찾아다니는 ‘미진’의 휴대전화에조차 ‘쓰레기’로 저장되어 있는 ‘중호’와, 이름보다는 ‘4885’라는 숫자가 더 어울리는 ‘영민’의 역할에 이른바 ‘대체재’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두 배우에게 쏟아지는 갈채의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배우와 극중의 캐릭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경우는 종종 있다. 김선아가 아닌 ‘김삼순’이 별로 상상되지 않고, ‘광개토대왕’ 하면 이제 배용준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지만 이전에는 없던 새로움이 주는 선착순의 이점에 기대지 않고, 정말 그 배우가 아니면 그 역할은 세상에 없었다라고 느껴지는 경지는 드물다. 드라마 의 극중 엄마인 ‘한자’를 배우 김혜자와 따로 떼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서 놀랍다.
“아프고 싶네요”에 묻어나는 고단함
“김혜자가 떴다”라고 표현했다. 아니, “김수현의 드라마에 오랜만에 김혜자가 떴다”라는 것이 더 정확한 얘기다. 당대 최고의 장인과 장인의 만남. 에서 그리고 에서, 김수현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대사를 김혜자만이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만났던 행복했던 추억을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풍 가기 전날 아이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말이 필요 없는 ‘역시’였다. 대놓고 “나 뒤둥그러졌어, 나 알아”라며, 사돈이 된 고교 동창생을 기암하게 했던, 남편의 외도를 알고 느릿 양치질을 하며 “더러워, 더러워”를 외치던 그 모습 그대로, 김혜자는 ‘한자’가 되어 나타났다. “누근들 지 인생이 맘에 들겄어? …알면서도 나는 내 인생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라고 속으로 ‘뿔’을 내는 ‘엄마’를 연기할 수 있는, 아니 보는 이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배우는 김혜자밖에 없다라고 감히 말하는 것은, 극중 ‘한자’가 살아내는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친구이자 그리고 엄마인 ‘1인 4역’의 고단함 때문이다.
‘원더우먼’이 엄마가 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엄마는 ‘원더우먼’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극중 ‘한자’가 신경써야 할 일은 ‘슈퍼 원더우먼’에게도 벅차 보인다. 바람 잘 날 없는 자식들의 문제는 일단 나중으로. “아부지”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고, 문안 인사에 “안 죽고 나왔으면 잘 잔겨”라고 얘기하는 시아버지가 어느 날 ‘씹는 것도 귀찮아서’ 사과를 한입 물고 내려놓아도 걱정이고, ‘걸음걸이가 아직은 짱짱한 것’에 그래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처자식 벌어 먹이느라 쥐꼬리만한 월급에 목줄 달려” 철도 공무원으로 40년을 보낸 남편이 혹 ‘꼬랑지가 내려’갈까 안쓰럽다. ‘심통만 안 부리면 50점은 되는’ 남편의 쌍둥이 동생 시누이는, 아무리 오랜 친구라도 남편과 동동주 한 번을 편하게 마시게 내버려두지 않고 샘을 낸다. 그래도 이 1인 3역은 나은 편이다. “자식 눈에서 눈물 흐르면 어미는 가슴으로 피눈물 흘린단다”라는 말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나머지 하나의 역할은 “아프고 싶네요”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만만치 않다.
부터 까지 놀라운 해석력
“오늘 탈영하나 내일 탈영하나 녀석이 군대 있는 삼 년을 오줌 지려가며 쫄밋쫄밋 보내게” 했던 큰아들은 다섯 살 많은 ‘누나’와 덜컥 애를 만들어 나타나지 않나, 형편이 ‘집에서 그래도 제일 나은’ 결혼 안 한 변호사 큰딸은 나이는 찰 만큼 먹고도 ‘일만하다 죽을 건지’ 심란하기 그지없다. “지 살 궁리 목돈 만드느라 만원짜리 이만원짜리 사들구 좋아라 그러는” 막내딸은 더 심각하다. 처음에는 ‘백수건달’인 줄 알았던 신랑감이 ‘서른 평 아파트’를 만들어줄 수 있는 집안이라 ‘얍삽’하지만 안심했던 것도 잠깐.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자기 빼고는 전부 다 ‘겨우’인” 시어머니 자리의 반대로 눈물 콧물 쏟는 걸 보면서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내 새끼야”라면서도, ‘끼익 이것밖에는 안 되는’ 부모로서 감내해야 하는 설움은 “육체적으로 마음적으로도 고단하게” 한다. 이렇게 ‘책 한 줄을 편히 볼 새가 없는’ 처지만을 전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김혜자가 연기하는 ‘한자’에서는 그 이상이 느껴진다. 바로 산다는 것의 피곤함이다.
이순재·강부자·백일섭과 현악 사중주
김혜자는 작품마다 변신하지만, 한편 변하지 않는다. 느리지만, 대본 속에 쓰인 쉼표까지 느껴지는 그의 대사 처리 방식은 부터 까지 한결같다. 하지만 매번 다른 인물로 느껴지는 것은 상황 및 그것으로 인해 영향받은 인물에 대한 그의 놀라운 해석력 때문이다. ‘돈이 계급인 세상’에서, ‘별이 별똥별을 상대하기 싫어하는’ 현실에서, 자신의 딸만은 어떻게든 ‘별 부스러기’로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소박한 욕심을, 자신이 겪은 삶의 지난한 피곤을 물려주기 싫은 엄마의 마음을, 그녀는 대사뿐 아니라 대사와 대사 사이로 전달하는 법을 안다. “돈이 시키는 마음고생은 별거 아닌 줄 알어? 얼마나 서글프고 비참한데”라는 그녀의 속내를 들으면, “웃는 얼굴로 산 사람 포 뜨는” 시어머니가 등록금 걱정하며 ‘브라우스 한 장 살래두 잡았다 놨다 잡았다 놨다’ 하는 삶보다는 차라리라고 고개 끄덕여진다. 며느리로는 ‘울면이 먹고 싶으면 감기가 오는 줄’ 아는 시아버지가 사다준 카디건 하나에 소녀처럼 좋아해야 하고, 아내로는 “당신 나 한번 웃겨봐”라며 남편의 몸 개그에 깔깔 웃어야 하고, 병문안 온 시누이가 옆에서 코를 골고 자도 그 마음만을 볼 줄 아는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는, 이 모든 ‘피곤함’이 곧 삶이고 그런 마음의 주고받음이 가족이라는 것을 김혜자 아닌 다른 누구의 ‘한자’요 ‘엄마’였다면 이렇게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김수현이 위대한 작곡자라면 김혜자는 자기만의 스타일로 노래할 줄 아는 최고의 가수다. 느리게, 하지만 또박또박, 그녀는 자신이 부를 노래가 느린 랩인지, 애절한 발라드인지 아니면 구성진 뽕짝인지를 아는 영민함으로 그녀가 아니면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만들어간다. 드라마 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 이순재, 강부자, 백일섭 그리고 김혜자, 이렇게 넷이 함께 등장해서 말을 하기 시작하면, 마치 최고의 현악 사중주를 듣고 있는 착각을 하게 된다. 이분들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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