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춘향전의 시련

등록 2007-11-09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미하일 포킨이 그렸던 춘향 복원한다더니… 국립발레단 을 보고 씁쓸해지다 </font>

▣ 서주연 무용비평연구자

한국 영화의 역사를 알려면 을 알아야 한다는 비평가 정종화씨의 말이 이제 춤판에도 들어맞는 시대가 도래하는가 보다. 올해 춤판에는 봇물 터지듯 각양각색의 이 쏟아졌다. 유니버설발레단, 안은미무용단, 국립무용단에 이어 국립발레단이 가세했다. 특히 세간의 눈길은 단연 국립발레단이 꾸린 에 쏠렸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전설적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이 을 바탕으로 만든 발레극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동작과 마임, 유아적 안무

10월31일~11월3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120회 정기공연을 통해 복원된 은 기존 국내판 과 확연히 다른 이질적 얼개를 지녔다. 춘향과 몽룡의 연애담을 동성애로 비틀거나 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등 그동안의 다양한 재해석이 무색할 정도로, 이방인이 안무한 은 원작을 완전히 뒤집었다. 춘향과 몽룡, 월매, 사또의 인물 설정, 플롯, 주제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형됐다. 발레단 쪽이 문헌과 동영상 연구를 통해 의상과 무대장치를 제외한 원작을 고스란히 복원했다고 밝힌 은 근현대 발레사를 새로 쓰게 한 러시아 거장의 작품이란 점이 일단 중요하다. 포킨은 20세기 초 유럽 춤판을 주름잡은 발레단 발레뤼스의 안무가로서 고전 발레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무용 원칙을 재정립했다. 이 혁신적 안무가가 무대화한 버전의 국내 복원은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공연을 보고 나서는 씁쓸한 뒷맛이 더욱 강하게 남았다.

작품 내용은 단순하다. 부잣집 딸 춘향이 가난한 청년 몽룡과 사랑에 빠지지만 탐욕스런 아버지 만다린의 반대로, 춘향은 중국 사신과 억지 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용의 탈을 쓰고 등장한 몽룡이 사신을 쫓아낸 뒤 춘향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다는 줄거리다.

실제 공연에서 발레극의 내용들은 프로그램을 미리 읽지 않아도 이해할 만큼 대사 없는 마임으로 대부분 처리됐다. 각 캐릭터의 성격 역시 움직임 속에 명확하게 드러나 보였다. 다리로 몸을 긁적이며 몽룡을 따르는 원숭이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만다린의 주위를 돌면서 그의 욕심을 조롱하는 나비들은 간단한 동작으로 명쾌한 특징이 드러나는 캐릭터다. 부레(발끝을 세워 이동하는 발레 동작)와 피루엣(한 발 끝으로만 서서 회전하는 발레 동작), 고갯짓, 검지와 중지를 모으는 손동작을 앙증맞게 추는 춘향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알통을 과시하는 청년 몽룡, 부와 권력을 상징하듯 앙트르샤(공중으로 뛰어올라 양발을 교차하는 동작)를 반복하는 중국 사신 또한 캐릭터는 뚜렷하다. 문제는 그런 캐릭터의 움직임이 발레의 테크닉이 없는 단순한 동작들로 시종일관 각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무대의 구성도 특별한 구도 없이 평면적인 일자 모양의 대형이나 원을 쓰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미하일 포킨이 세운 안무의 다섯 가지 기본 원칙, 즉 동작은 내용을 담아야 하고 나라의 시대와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등의 원칙들을 발레단 춤꾼들이 일정 부분 실현하려 한 의도로도 생각된다. 작품의 분위기도 모차르트 선율에 맞춰 시종 경쾌하게 흘러간다. 물론 관객은 간간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는 냉소적인 면이 강하지 않을까. 극중에서 되풀이되는 등장인물들의 단순한 동작과 마임은 치기 어린 유아적 안무에 가까웠다. 움직임이 해체되고 재조합되는 현대발레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의 단순명쾌한 안무는 시대착오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기 십상이다. 70년 동안 유럽에서 떠돌다 겨우 한국에 도착한 작품을 당장 높이 평가하기 어려운 건 이런 이유에서다.

와는 왜 엮었나

프로그램 기획상의 문제도 생각해보고 싶다. 이번 공연에서 은 숲 속 요정들의 환상적 발레인 포킨의 다른 소품 와 거장 발란친의 무용 인생을 담은 에이프만의 현대발레 사이에 낀 채로 선보였다. 그런 탓에 역사성과 작품성이 적잖이 퇴색됐다. 후자의 두 작품을 국립발레단이 춘다는 데 의미를 두게 된다면, 은 포킨의 안무를 복원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성격이 크게 다른 세 작품이 연속 공연되므로, 일반 관객은 프로그램상 같은 잣대를 대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춤의 역사에서 포킨의 위치, 안무의 취향, 을 복원한 과정과 특징 따위의 학술적 맥락에서 작품이 부각됐다면 관객도 다르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세계적 안무가 에이프만이 2002년 발레 거장 발란친의 서거 100주년을 기려 뉴욕시티발레단에 헌정한 는 무대 마지막을 장식했다. 발란친의 파란만장한 무용 인생을 군무와 2인무 등으로 다룬 작품이지만, 정작 무대에서는 상처 입은 한 남성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그친 듯한 느낌으로 남았다. 란 제목은 본래 그리스 신화 속의 춤과 노래, 시, 연극 등 여러 예술을 주재하는 여신을 뜻하나, 작품에서는 발란친이 흠모했던 여성 무용수들을 의미하고 있다. 극중에서 3명의 뮤즈와 선보인 2인무(파드되)와 떼춤(군무)은 에이프만의 대표작 장면들을 붙여놓은 콜라주처럼 다가왔다.

이 작품은 에이프만이 즐겨 쓰는 애크러배틱한 동작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파드되가 중심이다. 길고 유연한 에이프만 특유의 발레춤 캐릭터와 국립발레단의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거리가 있어 보였다. 튀튀(짧은 발레복)를 입고 다 같이 군무를 추는 마지막 장면은 발란친이 생전에 내보였던 주요한 안무 동작들을 뽑아낸 것으로 그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미국적 버라이어티 무대였다. 하지만 국립발레단의 상당수 무용수들은 동작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거나 정교하지 못한 기본 테크닉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비교적 완벽하게 에이프만의 움직임을 몸에 익힌 무용수는 캣 역을 맡은 김리회씨였다. 아트서커스 을 연상시키는 애크러배틱 동작들로 이뤄진 파드되는 김씨의 신체가 만드는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듯했다. 그는 두 다리가 가장 먼 곳에서 만나는 동작을 도전적이고 야무지게 해내어 에이프만 무용수들과 또 다른 미학을 표현했다.

원작의 땅에서 복원한다고 흥분만?

‘누드’ 파문으로 언론을 달구었던 발레리나 김주원씨는 극중 플라워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안정되고 부드러운 상체 움직임,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표현력이 뛰어났지만, 파드되에서 신체의 유연함이 보여주는 여유와 극단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에너지는 다소 미흡했다. 이번 정기공연은 을 원작의 땅에서 복원하는 무용사적 의의가 각별한 무대였다. 예술의 재발견은 흥분을 낳지만, 보존과 발전은 두고두고 냉정하게 고심해야 할 난제다. 이 진화하기를 바란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