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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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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에 예술 익어가는 소리

등록 2007-11-02 00:00 수정 2020-05-03 04:25

옛 인천 양조장을 재구성해 탄생한 대안공간 스페이스 빔

▣ 인천=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우리네 술은 취하지 않습니다. 대신 맘과 느낌을 좀더 맛깔나게 적셔주죠. 다름 아닌 예술!!”

의미심장하기도, 좀 썰렁하기도 한 소개말이다. 대안공간 스페이스 빔의 기획자 민운기씨는 웃으면서 뒤쪽 건물 외벽을 가리켰다. ‘인천양조주식회사’라는 1920~30년대의 작은 대리석 명패가 문 옆에 붙어 있다. 인천 동인천역 부근의 창영동 7번지.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70년 넘게 인천 특산 막걸리 소성주를 빚어온 옛 인천 양조장의 2층 건물이 스페이스 빔의 보금자리다. 약 10년 전 폐업한 붉은 벽돌+콘크리트 구조의 옛 양조장, 그리고 좁은 문. 지나치기 딱 좋은 듯한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옛 양조장을 개조한 스페이스 빔의 전시장 우각홀. 10월5~18일 건축비평가 전진삼씨의 기획으로 열린 ‘상상의 대지 탐사’전의 모습이다. 벽돌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공장 공간을 거의 그대로 살린 채 건축 모형과 사진을 전시했다. 2층 벽과 품질향상이란 양조장 시절의 구호가 그대로 붙어 있다.

공장 라인엔 미술품, 시음실에선 마임

갑자기 공간 풍경이 우르르 변했다. 1, 2층이 탁 트인 공장 내부. 내벽에 ‘품질향상’이란 구호가 붙어 있고, 아래 바닥에서는 건축 패널과 짚으로 만든 자연 미술, 설치작품, 미디어 영상들이 꿈틀거리며 서로 어울려 논다. 70여 년 누룩으로 막걸리를 빚었던 동네 양조장이 ‘예술’을 빚어내는 문화 양조장으로 변했다. 술지게미와 누룩덩이, 막걸리 국물 넘치는 술병들이 줄줄이 생산돼 나오던 공장 라인 250여 평이 3~4개 마당의 미술품 전시 구획으로 나뉘었다. 기계 설비가 놓여 있거나 막걸리가 가득했던 생산실에는 그림과 미디어아트, 설치작품, 건축물 모형이 죽 내걸리거나 놓였다. 술 담그는 원재료인 고두밥을 넣던 방, 발효실, 시제품 탁주를 맛보는 시음실 자리에 젊은 자연미술 작가들의 전시 작업 구상을 담은 스케치들이 막 발효를 하기 시작한다. 악쓰며 마임 동작을 연습하는 청년 연극인들의 기합이 시음실 퍼포먼스 방에서 터져나오고, 공간의 가장 깊숙한 곳이자 전철 방음벽이 보이는 뒤쪽 테라스에서는 동네 아저씨들끼리 담배 피우며 밀담을 하고 있다. 그 아래 고구마, 토란을 가꾸는 한 뼘 밭의 정경이 눈에 와닿는다.

장바구니 구럭 같은 공간 속에서 전시도 하고 연극도 하고, 마을의 생활 경관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도 하고, 이 동네를 가로지를 산업도로 주민 반대투쟁 계획도 모의한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미술사 공부도 하는 예술 양조장의 일상이 비빔밥처럼 섞여 희한한 맛을 낸다. 그 안에 항구도시 인천의 근대기 흔적들이 남긴 시간의 켜와 자취가 현대미술과 함께 살아 숨쉰다. 지난 9월8일 구월동 언덕배기에서 스페이스 빔이 이곳 배다리골 양조장으로 옮겨온 것을 현지 문화인들과 언론들은 인천 문화예술운동사의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2002년 이래 지역 소장 작가들과 지역 시각문화 운동의 거점이 된 이 대안공간이 배다리골을 두 동강 낼 인천시의 송도행 산업도로 건설에 맞서기 위해, 근대 생활사 흔적을 지키기 위해 폐가 같던 옛 양조장의 리모델링 이전을 선택한 것이다. 실제로 시민단체들이 배다리 산업도로 저지운동을 시작한 건 지난겨울 스페이스 빔이 작가들과 함께 벌인 도시유목 답사 프로젝트 작업이 물꼬가 되었다.

“연극 연습에 미술 작업이 영감 줘”

스페이스 빔이 있는 지역은 인천 근대 유산들의 밭이다. 소의 뿔을 닮았다는 우각골 언덕은 19세기 말 조선 철도사의 시작인 경인선 철도를 처음 터파기한 곳이다. 비슷한 시기 지은 외국 여선교사 사옥, 창영초등학교 등의 근대 건축물들또한 즐비하다. 해방과 한국전쟁 뒤 형성된 수도국산 달동네, 헌책방·문방구 등이 밀집한 배다리골은 외지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9월8일 개관한 스페이스 빔은 폐가와도 같았던 양조장 공간에서 지역 공간 되살리기의 본보기를 실천하고 있다. 양조장의 70년 역사, 주민들의 잡초같은 삶, 작가들의 전위적인 문화예술이 서로 얽혀드는 기기묘묘한 공간을 되살림 건축의 방향으로 잡았다. 주민들의 모임 공간과 건축, 퍼포먼스, 영상, 연극이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양조장 문화공간이 그런 노력 끝에 태어났다. 이채로운 것은 이 되살림 건축을 건축가의 설계나 조력 없이 진행했다는 점. 민운기씨와 후원회원 20여 명이 머리를 맞대고 공간을 재구성하고, 십시일반으로 낸 2천여만원을 들여 리모델링을 계속했다. “이곳의 삶과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감, 여기서 터를 박고 문화판을 벌여야한다는 절실한 생각들이 어울려, 색다른 리모델링이 가능하게 된 것 같다”고 민씨와 회원들은 말한다.

지난 10월23일 찾은 스페이스 빔에서는 공연지원작으로 선정된 연극 의 청년 배우들이 12월 공연을 앞두고 연습 중이었다. 1층과 2층의 전시장 우각홀과 시음실에서는 금강국제자연미술프리비엔날레에 출품된 콘셉트 작품들이 드로잉과 영상물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1층에서는 이 공간이 주관하는 작가 지원 대상자로 선정된 독일 유학생 출신의 이정숙씨가 자신이 직접 만든 독특한 이미지의 픽토그램(사람을 길쭉한 막대의 조합된 모양으로 재현한 표지판 등의 디자인 이미지) 스티커 작업들을 붙여놓았다. 작가들 줄세우기보다도 공공적 소통을 중시하는 이 대안공간 활동의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풍경이다. 이씨는 “전시가 끝날 때까지 관객 반응을 모아 전시를 완성하는 것이 작업의 얼개”라며 “어떤 대답과 결과가 나올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자극이 된다”고 설명한다. 마임 동작을 연습 중인 연출가 이범씨는 “몇 달 전부터 무료로 연습할 수 있고, 옆에 미술인들의 영상, 설치작업이 있어 색다른 영감을 충전하면서 작업할 수 있다”고 기뻐했다.

“지역 공동체·현대미술 상상력 조화”

기획자 민씨의 말을 따른다면, 예술을 발효시키는 문화 양조장을 표방한 스페이스 빔은 틀잡기를 피하는 유목적 공간을 좇아왔다. 미대를 졸업하고 개인 작업을 하다가, 현대미술과 제대로 접목된 지역운동을 해보고 싶어 뛰어들었다는 민씨는 탈중심의 공동체 문화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계속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스페이스 빔의 내부 공간은 위계가 없다. 큐레이터도 없고 내부 기획도 회원들끼리 논의해 한다. 전시 틀이 자유로워 인터넷 라디오 공개방송을 하거나 건축비평가의 건축전을 벌이기도 한다. 몇몇 작가들은 배다리골을 한 달간 답사한 뒤 탐험전도 벌였다. 리모델링한 내부의 전시 교육 학습 공간들은 술의 발효 공정에 따른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공간 앞쪽의 사장실과 수위실은 옛 집기를 그대로 둔 채 타임머신처럼 보존되고 있어 더욱 독특하고 향수 어린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용자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버려지는 공간이 얼마든지 생동하는 건축공간으로 재생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이 양조장 공간은 새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민씨는 “지역 공동체 관심사와 현대미술의 상상력이 서로 접점을 이루는 모델을 찾는 것이 이 공간의 주된 임무”라고 했다. 물론 주민과의 작품 소통, 공간 홍보 활동의 방향성 등에 대한 고민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디자인 비평가인 김민수 서울대 교수는 “양조장 리모델링을 통해 장소가 지닌 시간의 켜를 잘 살려냈으나, 콘텐츠인 전시는 전문성만 강조하는 자폐적 성격이 보인다”면서 주민과의 실질적인 소통 노력을 당부했다. www.spacebeam.net, 032-764-2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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