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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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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이 금빛에 사무치다

등록 2007-08-03 00:00 수정 2020-05-03 04:25

‘사경변상도의 세계, 부처 그리고 마음’전에서 마주한 환상적인 사경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우리 사랑이 영원하기를! 짙푸른 빛의 감지 화폭 속에서 금빛 선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여인 보살들은 사방으로 꽃을 흩뿌리며 축복을 내린다. 호리호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의 그리스 여신 같다. 금물로 정성껏 그린 당당한 자태, 나부끼는 옷깃 자락은 온통 꽃바람, 구름 속에 휩싸였다. 은은한 미소 머금은 그들 위로 비파, 북 등의 악기들도 허공을 휘저으면서 둥둥 떠다닌다. 향긋한 꽃내음이 악기의 낭랑한 소리 속에 진동할 듯한데, 꽃과 풀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그들 곁에서 피어난다. 이 그림에 이어 칼날 같은 기세를 자랑하는 골기 가득한 불경 글씨가 이어진다.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 보살로 수행하는 법과 부처가 되는 방편 등에 대해 여러 경전을 엮어 서술한 의 32권을 베껴 쓰면서 모두 금물로 글씨를 옮기고 이를 축복하는 사랑스런 보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 환상적 풍경을 누가 어떤 이유로 그리게 한 것일까.

천추태후와 김치양, 불륜과 권세 꿈

알 듯 모를 듯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보살 공양상을 그리며 소원을 빈 주인공은 고려 6대왕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그의 연인인 권신 김치양. 성기가 큰 간신과 간통하며 나라를 망친 못난 왕비로 에서 매도당했으나, 최근 고려시대 가장 걸출한 여걸 정치가로 재평가되고 있는 이 여인이 연인과 함께 부처님께 발원한 일종의 사랑 그림인 것이다.

그들이 발원하려 한 구체적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불륜 남녀의 사랑 기원일까. 영원토록 눈 맞아 권세를 누리려는 욕망의 발로인가. 대충 짐작은 간다. 남편 경종이 죽은 뒤에도 연인과 사통해 아들까지 낳은 ‘불륜’(?)의 주인공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작당해 목종마저 제거하고 권세를 이으려 한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서북 변방군 사령관인 강조 장군의 반란으로 김치양 부자는 참살당하고, 태후 자신은 황해도 황주로 내쫓겨가 한을 품고 죽는다. 이 역사적 비극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 그림은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다. 덧없는 아름다움과 권세의 속설을 방증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아뜩하고, 한편으로는 착잡함을 느끼게 된다. 고려시대 사경변상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 그림은 일제시대 이전에 일본 땅으로 건너가 지금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교토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두 연인의 행복한 발원을 담은 작품이 어떤 영문으로 일본 땅에 건너갔을까. 이런 내력을 모르는 후대 승려가 일본 승려에게 그냥 주었거나, 아니면 고려 말 왜구의 약탈로 현해탄을 건너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이 그림은 사경변상도의 하나다. 부처의 복을 받기 위해 실제 불경 글씨를 감지에 금물·은물 글씨로 베껴 옮긴 사경 앞부분에 실려 있다. 베낀 글씨 앞부분에 불경 글자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림으로 풀이한 그림이란 뜻이다. 고려시대 사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1066년 목종 때의 사경변상도다. 고려시대 금자대장경으로는 유일한 이 작품은 글씨 또한 마른 듯하면서도 날카롭고 우아한 구양순 서체여서 더욱 인상이 강렬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특별기획전으로 준비한 ‘사경변상도의 세계, 부처 그리고 마음’전(9월16일까지·02-2077-9271)은 한국과 일본의 25개 소장기관을 수소문해 명품 사경 유물 100여점을 모았다. 유물의 규모나 품격, 학술적 의미 측면에서 기념비적이란 수사를 붙일 수 있는 전시마당이다. 사실 우리가 종이에 그린 회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기는 사실상 조선 중기 이후부터다. 따라서 감지에 그려진 채 절이나 박물관 깊숙이 파묻혀있던 이들 사경 그림은 지금도 전모를 잘 알기 힘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 옛 사람들의 그림 솜씨를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은으로 새긴 글씨, 금물로 그린 그림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국보 196호 그림은 754~755년 황룡사 승려 연기법사가 발원해 그린 국내 최고(最古)의 사경 그림이다. 오래되어 두 개의 조각만 남아 있는 이 변상도는 종이 안쪽 면에 비로자나부처와 보현보살로 보이는 보살, 그리고 그 주변에 여러 풍만한 보살상들이 각각 금은선으로 묘사돼 있다. 부처 보살의 살찐 듯한 얼굴과 활력 넘치는 선묘사에서 서역과 당나라의 양식이 느껴진다.

역시 리움이 소장한 국보 210호 그림은 고려 충렬왕 1년(1275) 왕이 직접 발원한 것이다. 그래서 정성이 대단하다. 감색 종이에 은으로 글씨를 쓰고 금물로 대장경 사경을 지키는 불교의 신장상을 그렸다. ‘위태천’으로 불리는 이 신장상은 몸은 화면 오른쪽을 향하고 얼굴은 반대로, 치맛자락은 왼쪽으로 힘차게 휘날리며 머리 위의 불꽃 무늬는 오른쪽으로 뻗고 있다. 역동적 움직임과 위압적인 신체의 변화, 힘의 균형이 대단하다. 이런 신상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사경도는 1283년 충렬왕 때의 권신 염승익이 발원한 법화경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1915년 개성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진 고려시대의 남계원 7층 석탑의 이안 과정에서 발견된 이 사경은 이번에 보존 처리를 마치고 처음 공개됐다. 오른손에 신장이 쓰는 무기라는 금강저를 잡고서 연화좌를 꽉 밟은 채로 머리에는 화염 무늬가 이글거리고, 다리통에 근육이 불거진 채로 바람에 천의가 마구 흩날리는 신장상의 카리스마. 이 사경을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는 의지가 그 표정과 자태에서 읽힌다. 경전에 묘사된 신장상의 내용을 텍스트만 읽고서, 이렇게 생생한 자세와 구도로 표현할 수 있는 화공의 상상력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왕의 사경에만 썼다는 신장상 그림을 일개 신하가 발원한 사경에 넣었다는 사실에서 염승익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것도 일러주는 그림이다.

역시 고려 말인 1332년의 그림은 일본 소장품으로 화면 가운데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를, 그 앞에 사리불과 칠보탑을 그렸고, 좌우로 사천왕과 팔부중 등 여러 신중과 비구들을 담아 매우 장중하고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역시 1334년 그려진 그림(보물 752호, 호림박물관 소장)은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부처의 공덕을 성취하기 위해 닦을 10가지 원칙을 설법하는 장면인데, 보살의 야릇한 얼굴 표정과 보살에게서 뻗친 광선 위로 구름에 앉은 불보살 비구의 스펙터클한 모습이 눈길을 모은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림 기법 떨어져

인간적인 면모도 빼놓을 수 없다.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15세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감지에 금물·은물을 써서 장식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줄고, 그림 기법도 훨씬 떨어지게 된다. 정밀한 세부 묘사를 할 수 있는 화공들이 줄면서 그림과 사경도 덩치가 커지고 묘사는 도식화한다. 소용돌이 몇 개로 구름을 표현하고, 보살들도 부처상의 무릎 이상으로 키가 쑥쑥 커지는가 하면, 당대 풍속 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흑석사의 불상 뱃속에서 나온 복장 유물에 보이는 15세기초 사경(국보 282호)은 감지 바탕에 변상도를 그릴 자리까지 비워놓았으나 끝내 그림을 채우지 못했다. 대신 선대 어느 화공이 보살 머리를 끄적거린 그림 습작이 남아 있는, 백지에 금으로 어설프게 그린 변상도를 사경에 같이 끼워넣은 채로 발견됐다. 그림을 못 그리고 억지 구색을 맞추려 했던 흔적이 보여 웃음을 머금게 한다. 기획자 배영일 전시팀 학예사는 “사경변상도를 복장 속에 넣어 구색을 맞춰야겠는데, 고려 때와 달리 고도의 신앙심과 예술 의지로 변상도를 그릴 화공을 찾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다른 볼거리도 풍성하다. 고려의 명화가 노영이 그린 아미타구존도, 담무갈, 지장보살현신도(복제본) 그리고 오리 등의 금수와 어울린 동자의 천진한 모습이 인상적인 경갑(불경 사경을 넣어두는 용기), 향로, 금판사경, 선재동자 애니메이션 등의 흥미로운 사경 관련 시각물과 자료들도 만난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릴 수 없다’는 사경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전시는 지금껏 전하지 않는 통일신라·고려의 높은 회화 수준, 당대 권세가와 승려들의 신앙심, 인간적 감정들을 한꺼번에 엿보게 한다. 특히 일본 소장 사경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자매결연한 일본 박물관 네트워크의 도움을 얻어 모은 것들로, 일본내 옛 고려 조선 사경과 국내 사경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사경을 일컬어 극한의 신앙심과 고도의 기량이 결합된 예술품으로 정의한다. 금물과 은물을 붓에 묻혀 그릴 경우 단단한 기본기가 없으면 필력이 달려 작은 형상 하나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정밀하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그리는 것이니, 그 필치에 당대를 살아가는 옛 사람들의 인간적인 생각이 묻어나며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관념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한마디로 언어와 문자는 생각이요 관념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예술장르가 사경 그림인 셈이다. 사경 전문가인 박상국 문화재위원은 “사무치는 신앙심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최상의 예술적 행위와 다름없다”고 극찬했다. 조선 전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던 대학자 서거정(1420∼88) 또한 사경과 변상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런 시구를 남기고 있다. ‘오직 불경 베껴쓰며/ 티와 때를 씻어버리려 생각하네/ 맑은 바람이 온 방을 휩쓰는데/ 그리운데 또 무엇이 있는고/ 밝은 창 앞에 깨끗한 책상 놓고/ 한 자 쓰고는 세 번 머리 조아리네.’

(사진도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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