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훈 기자
“희망을 버려. 그러면 편해져. 대신 밥 먹고 힘내.”
(2006) 중에서

영국 런던 출장을 갔다가 탈이 났다. 위장이 꼬이고 소장이 뒤틀리고 대장이 용틀임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어. 룸서비스 메뉴를 펼쳤다. 등심 스테이크. 이걸 먹었다간 죽고 말 거야. 영국식 소 콩팥 파이. 그냥 죽어버리라는 하늘의 계시군. 기름을 잔뜩 바른 그릴에 그릴그릴 구운 요리밖에 없는 룸서비스의 행태를 비난하며 그나마 먹을 만한 ‘도버해협에서 잡은 도미 요리’를 시켰다. 알고 보니 기름 덩어리 도미였다. 한 입을 먹었더니 위장이 폴카를 췄고, 두 입을 먹었더니 소장과 대장이 돌기들을 맞잡고 플라멩코를 추기 시작했다. 그길로 호텔을 뛰쳐나가 지하철 서너 정거장을 달렸다. 중국 식당과 일본 식당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국물이 필요했던 나는 일본 라멘집에 냅다 몸을 던졌다. 향긋한 미소 국물의 향기. 미소라멘 한 사발에 기운이 났다. 위장이 풀리고 소장과 대장이 조용히 부루스를 췄다. 다 착각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대단한 내추럴 본 코즈모폴리턴이라 여겨왔건만, 실은 대단찮은 동양인 여행자에 불과했다. 나이가 들수록 위장의 대담함은 약해진다. 기름 덩어리 피시 앤드 칩스로 열흘을 버틸 수 있었던 20대는 이제 작별을 고했다. 밥심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아저씨의 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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