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드라마부터 퀴즈쇼까지, 알토란 토속어 넘실넘실…여주인공 입에서 나오는 오묘한 말이 풍부한 감정 부르네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노현정님께서는 우리의 언어생활을 지도해주신다. (한국방송, 화 밤 11시5분) ‘올드 앤 뉴’에서 말이다. 진기명기인 줄 착각할 만큼 명확한 발음으로 “붉은 밭 풋 팥죽, 햇콩 단콩 콩죽, 검은깨 들깨 통깨 복합깨죽”()을 줄줄이 읊으시는 분에게 ‘짜장면’은 곧 먹고 죽더라도 ‘자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대관절, 이런 말씀을 하시었더랬다.
“사투리는 우리 언어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말입니다. 살려 쓰고 보존해야 합니다.” 앗! 그런가요. ‘괴발개발’이 정답일 때는 ‘개발새발’은 틀린 말이라고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주시던 분이, ‘설레발’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깝치다’(재촉하다는 경상도 사투리)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었는데, ‘투미하다’가 나왔을 때는 ‘티미하다’를 정답으로 내민 사람의 머리를 후려치며 “공부하세요”라고 하셨는데, 아니, 사투리라니요,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합니까.
“대뜨방 알아체구 질금령하구 숨어두…”
깝죽대자면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라고 정의되는 표준어에 비상이 걸렸다. TV에 사투리가 넘쳐난다. 드라마의 주인공 중 사투리를 쓰는 사람도 여럿이다. (2005)와 같은 사실적 재현을 염두에 둔 ‘군상극’에서뿐만이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이 많아졌다. (문화방송, 토·일 저녁 7시50분)의 여봉순(유진)은 강원도 산골소녀로 강원도 본토 그대로의 사투리를 사용하고 종영된 (2006)의 주인공 복실(정려원)도 강원도 사투리를 썼다. <dr.>(2006)의 주인공인 유나(한가인)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어린 시절 사투리만 쓰던 사람들도 어른이 되면 표준말로, 특히 여자 주인공은 틀림없이 그렇더니 이제 개인 역사를 속이지 않는 ‘사투리 여자 주인공 범람기’를 맞은 것이다. (2002)에서 장나라가 충청도 사투리를 쓰며 부잣집 도령님을 휘어잡을 때 이후로 대명천지할 사건이다.
드라마에서 사투리는 ‘전형성’을 강화하는 도구였다. (1999)의 양정팔 역을 맡았던 성동일이 대본에 얽매이지 않고 사투리를 끌어들여 자신의 성격을 완성했듯이, (1986)의 조형기가 사투리를 써서 난봉꾼을 미끈하게 봉합했듯이, 조연 배우들은 뾰족한 자신의 역을 확정짓기 위해 사투리를 즐겨 사용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라면 폭력적이다. 여린 감성의 남자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면 야비하다. 직언을 하는 남자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조연들의 언어였던 사투리가 ‘양지’로 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투리는 전형성 강화를 넘어서, 영리한 전략으로도 쓰인다. <dr.>의 달고(양동근)는 서울내기인데 경상도 사투리와 서울말 이중어를 구사한다. 양동근은 존경하는 조직의 보스에게는 꼬박꼬박 사투리를 쓰는데 넘버투 조장식에게는 사투리를 쓰다가 돌연 서울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투리 서툰 배우의 실수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동료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조장식은 달고에게 “왜 갑자기 서울말을 쓰냐”고 말한다.
에서 강원도 사투리는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향수를 데서 나아가, 현대사회가 ‘잊어버린’ 공동체적 정체성을 환기시킨다. 여봉순과 남봉기(이민기)가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은 ‘강원도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봉순이 갑자기 정선아리랑 “담뱃불이야 번득번득에 임 오시나 했더니~ 그놈의 개똥불이야 나를 또 속였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봉기는 봉순을 보며 정신이 나갔냐는 듯 머리에 동그라미를 그려대지만, 분홍 보자기에 염소까지 데불고 버스 바닥에 철푸덕 앉은 사람들은 하나둘 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가 억양만을 딴 ‘무늬만 사투리’에서 벗어나 말에 토속어를 알알이 박아넣은 것도 커다란 성과다. 시청자들의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 자막을 넣어달라는 원성을 들을 만큼 “머언 사냥꾼들이 저래두 고무질빵이나. 암만 대갈통 먹통인 도야지새끼라두 저래 귀꾸멍 터지게 쏴대는 데야 왜서 지 죽이러 온 주를 몰라아. 대뜨방 알아체구 질금령하구 숨어두 하마 숨었지 머”라고 무시로 사투리 범벅된 말을 날려서 즐거움을 준다(대사에 나오는 사투리를 모은 ‘강좌’가 드라마 홈페이지에 있다).
퀴즈, 폴깡은 무슨 뜻일까요?
드라마에서뿐만 아니라 오락 프로그램에도 사투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5월1일 첫 방송된 (문화방송, 월요일 저녁 7시20분)는 팔도 사투리가 주인공이다. 회를 거치며 다듬어진 ‘사투리 능력시험’은 1교시 ‘사투리 듣기평가’로 사투리를 듣고 그 뜻을 맞히는 것이다. 전라도의 갠질밥, 충청도의 깡개, 강원도의 히벤하다 등이 예를 통해 소개되었다. 국립국어원 등의 감수를 거쳐 단어의 뜻이 요모조모 분석된다. “강원도에서는 말을 생략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릇은 ‘글’로 줄어든다. 그래서 “‘글쓰 다오’는 그릇을 달라는 뜻” “솔직해지다는 ‘솔다’라는 공간이 좁다라는 단어에 변화를 나타내는 말이 붙은 것으로 ‘날씬해지다’”라는 뜻이 설명된다. ‘사투리 능력시험’ 2교시는 ‘사투리 다섯 고개’로 지역의 사투리 ‘보유자’들이 나와서 단어를 설명하고 패널들이 맞힌다.
의미와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만 말은 역으로 의미와 감정을 상기시킨다. 풍부한 감정이 아니라, 풍부한 말이 풍부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아예 표준어에 없는 행위나 사물을 지칭하는 사투리가 더하는 풍성함이라면 말해 무엇하랴. 에서 나온 문제 중 전라도 사투리인 ‘폴짱과 폴깡’이 있었다. 둘 다 ‘팔짱’이라는 뜻이지만 폴짱은 둘이 끼는 팔짱, 폴깡은 혼자 끼는 팔짱으로 구분된다. 노현정님의 사투리 적극 권장에는 이런 뜻이 있었을 게라. 그 뜻은 또 있다. 게시판에는 “아이들 외국어 하나라도 가르치려고 애쓰는 작금에 없어져야 할 사투리를 배우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느냐”는 시청자 의견이 오르기도 했다. 지금 표준어나 사투리나 영어 단어에 밀려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표준어가 사투리를 사어로 만들었듯 요즘의 세태는 표준어 또한 사어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노현정님께서 동병상련의 정을 사투리에 느끼셨나 보다.</dr.></d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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