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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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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지 마요, 혀 너무 좋아요.”

등록 2006-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저예산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의 달콤한 흥행 비결…
혈액형과 우울증에 매달리는 캐릭터들, 촌철살인 대사 뱉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달콤, 살벌한 연인>의 흥행 돌풍이 무섭다. 9억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HD 영화가 2주 넘게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하며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개봉 11일 만에 관객 120만 명을 돌파했고, 200만 명도 넘어설 기세다. 일부에서는 장기 흥행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예상을 깨고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달콤, 살벌한 연인>의 흥행 비결은 무엇일까. 촌철살인의 대사발로 달콤한 웃음을 끊임없이 선사하면서도 살벌한 상황을 살벌하지 않게 만드는 특별함이 <달콤, 살벌한 연인>에는 있다.

죄의식에 무감하네, 살벌한 미나의 매력

<달콤, 살벌한 연인>은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본 30대 대학강사인 대우(박용우)가 수상한 이웃집 여인 미나(최강희)를 만나 마침내 연애에 골인하면서 벌이는 로맨스를 줄거리로 한다. 대우의 달콤한 로맨스를 방해하는 미나의 살벌한 비밀이 겹치면서 영화는 로맨스에 스릴러를 더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스릴러의 골격을 빌려오지만 코미디의 재미에 끝까지 충실하다. 그래서 미나의 비밀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결정적이지 않다. 스릴러의 치밀함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살벌한 사연에 대처하는 연인의 자세가 중요하다. 미나는 엄청난 일을 수차례 저지르고도 마치 귀찮은 일을 끝낸 사람처럼, 좀처럼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앞으로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다짐을 할 뿐이다. 자신의 비밀에 대한 미나의 살벌하게 쿨한 태도는 관객에게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고 은근한 웃음까지 머금게 한다. 그리하여 스토리는 살벌하지만 이미지는 달콤한 영화가 탄생한다. 일상에는 어리숙하면서도 죄의식에는 무감한 미나의 캐릭터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상이다. 칼을 휘두르는 미나의 무표정한 연기에는 영화의 태도가 녹아 있다. 황진미 평론가는 <씨네21>에 기고한 글에서 “섹스나 폭력 장면이 거의 없는데도 18세 관람 등급을 받은 건 순전히 이데올로기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죄의식도 모성애도 없는 여성 킬러가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처벌도 받지 않는 이 영화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위협하는지 생각해보면 자명한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연인들은 사실상 연애를 한 번도 못해본 사람들이다. 대우는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연애를 해보지 못했고, 미나는 결혼과 동거를 거듭했지만 남성성의 폭력에 막혀 연애다운 연애를 해보지 못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들의 연애는 사실상 첫사랑이다. 영화는 한없이 쿨하지만 첫사랑의 느낌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들에게 슬쩍 애절함까지 느끼게 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 감독은 대중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가지고 논다. 혈액형, 별자리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대개 혈액형의 과학성을 믿지 않지만, 혈액형의 현실성에 굴복하게 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먹물’ 대우는 이런 상반된 태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미나가 혈액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식을 동원해가며 비웃던 대우는 결국 자신의 소심함을 “A형이라서”라고 말하게 된다. ‘우울증’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트렌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모든 일상의 위기를 우울증으로 몰아가는 정신과 진단에 대한 불신도 정확하게 포착한다. 투덜거리면서 정신과 진단서를 찢는 대우의 행동을 통해 우울증 만능처방을 조롱한다. 이처럼 지식인에 대한 조롱은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드다. 영화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모르는 미나의 편에 서서, 먹물들의 세상을 은근히 조롱한다. 조롱하되, 대놓고 야멸차게 조롱하지 않는다. 언제나 코미디의 형식으로 포장해 은근하게 조롱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이 관객에게 지나친 긴장을 요구하지 않고, 거부감을 주지 않는 비결이다.

발랄한 상상력, 먹물들을 은근히 조롱한다

무엇보다 <달콤, 살벌한 연인>을 보는 내내 재미를 선사하는 것은 ‘대사발’이다. 조금 지루해질 만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촌철살인의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고 영화에 흥미를 더한다. 대우는 자신에게 유치하다고 하는 미나에게 “그래, 나 유치해서 유치원 다녔고 유치하다고 유치장 갈 뻔했고 시인 유치환이랑 극작가 유치진 좋아한다”고 쏘아붙인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대사를 구원해 웃음의 코드로 바꾸어놓는다. 대사는 ‘시추에이션’과 결합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키스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대우가 미나와 키스를 하면서 “이게 뭐에요?”라고 물으면 미나는 “혀요. 싫어요? 빼요?”라고 대답한다. 대우의 솔직담백하고 포복절도할 반응이 이어진다. “빼지 마요, 빼지 마. 혀 너무 좋아요.” 키스를 하면서 대사를 웅얼거리는 대우를 보면서 웃음보를 터뜨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감독은 대사를 통해 은근한 복선도 깔아놓는다. 대우가 미나와 첫날밤을 보내던 날, 미나가 “과거는 상관없는 거죠?”라고 묻자 대우는 “괜찮아, 사람만 안 죽였으면 되지”라고 대답한다. 연인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영화의 맥락 속에 들어가 서글프면서 우스운 ‘시추에이션’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감독의 재능은 영화 곳곳에서 빛난다.

최강희와 박용우의 캐스팅도 절묘하다. 상당수 장면에서 티셔츠 ‘바람’으로 밀어붙이는 박용우의 숙맥 연기는 자칫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영화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최강희는 자신의 기묘하게 비현실적이면서 은근하게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극대화한다. 조연 캐릭터도 웃음을 더한다. 미나의 기묘한 동거인인 장미(조은지)는 단순한 감초 역을 넘어 영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한다. 대우가 미나의 비밀을 알아차리는데도, 미나가 비밀을 쌓아가는데도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렇게 반응하는 장미의 캐릭터는 <달콤, 살벌한 연인>에 의외성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조은지의 독특한 캐릭터와 능숙한 연기는 장미의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장미와 미나가 땅을 파면서 나누는 대사는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달콤, 살벌한 연인들>의 제작사인 싸이더스 FNH 유화영 마케팅 팀장도 “예상을 깨는 반전, 캐릭터의 독특함, 캐릭터를 살리는 대사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흥행 비결로 꼽았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저예산 영화가 가진 발랄한 상상력을 십분 살리고 있다. 장르도, 캐릭터도 적절하게 비틀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비틀기는 새로움을 원하는 대중의 감수성과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다만, <달콤, 살벌한 연인>은 ‘적절한’ 선에서 비틀기를 멈춘다. 그래서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정말 엽기발랄한 그 무엇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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