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난지도 작업실, 서울을 기억하세요

등록 2006-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시장 지시로 두달만에 뚝딱,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개관
지자체가 제공하는 무료 공간에서 공동체 환원 고민해야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대부분 창백한 살빛을 어둠 속에 드러내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송영규(35)씨. 그는 그늘진 캔버스에 아크릴로 얼굴과 손, 발 등만을 고집한다. 어딘가에 상처받은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런 송씨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아 ‘다른 작업’을 예감케 한다. 지난 4월6일 개관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널찍한’ 작업실을 얻었기 때문이다. “일반 주택을 작업실로 사용하다 보니 120호가 넘는 ‘대작’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제 몇백 호짜리 그림도 맘껏 그릴 수 있게 됐다. 다음달에 열리는 개인전에 대작을 내걸진 못하지만 이후에는 좁은 캔버스를 벗어난 작품으로 관람객을 맞을 것이다.”

침출수 처리장 리모델링… 17명 1년 무료

현재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는 송씨를 비롯해 17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다. 이들은 두 차례의 작품성과 창작 의욕·발전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하는 전문가 심사를 거친 뒤 면접을 통해 난지도 유휴시설이던 침출수 처리장을 리모델링한 스튜디오 입주자로 최종 선정됐다. 무려 14 대 1의 경쟁을 뚫고 작업실을 마련한 작가들은 조각 4명·설치미술 3명·서양화 7명·한국화 2명·사진 1명 등이다.

작가를 뽑는 데 지명도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는데도, 박사학위 소지자가 2명이고 해외 유학파도 더러 있다. 그런데 기존의 작업실이 있는 작가도 포함돼 심사의 공정성에 흠집이 나기도 했다.

어쨌거나 송씨처럼 작업실이 없어 창작 의욕을 잠재워야 하는 작가들이 1년 동안 전액 무료로 스튜디오를 사용할 기회를 얻은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이 행운은 쓰레기더미의 기억에 예술혼을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난 6일 개관식에서 서울시립미술관 하종현 관장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우리 작가들의 국제화 훈련장으로 육성되도록 하겠다”면서 ”외국 작가와 비평가를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입주 기간이 끝날 즈음에 작가들의 작업 결과를 공개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입주 작가들이 미술계의 예비 국가대표로서 ‘선수촌’ 생활을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애당초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건립 계획은 이명박 서울시장의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난지공원을 둘러보던 이 시장이 “유휴시설에 창작촌을 조성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한 게 계기였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국내외 거주 40살 이하 작가를 대상으로 입주 신청을 받았고 3월 말 선정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이다. 한 미술인은 “지자체에서 창작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과정에도 불도저식 행정이 그대로 적용됐다”고 지적했다. “난지도의 창작 스튜디오는 다른 곳들과 구별되는 공공 전략이 필요하다. 작가가 일방적 수혜자에 머물지 않고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환경 생태공원으로 거듭난 난지도의 공간적 특성을 감안한 창작 스튜디오 건립 계획이 필요했다. 지자체와 미술인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선 입주 심사 항목에 ‘공공성 확보’ 항목을 도입하고 입주 작가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 매니저도 둬야 한다. 이에 대해 서울시립미술관 박천남 전시과장은 “창작 스튜디오 개관은 1단계 과정일 뿐”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청소년 미술체험 공간을 조성해 입주 작가들이 참여하도록 할 것이며 약품 저장동이나 유량조정조 등을 활용해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할 예정이다.”

아직 리모델링 공사로 인한 페인트 냄새도 지워지지 않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여름이 다가오면 막힌 침출수가 새어나와 코끝을 자극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입주 작가들은 “서울 도심에서 이만큼 쾌적한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당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외국 창작촌의 면모를 난지도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입주 작가들이 시민의 혈세를 일방적으로 지원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두 달 만에 리모델링 창작 스튜디오를 초스피드로 개관한 ‘능력’을 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 개발에 쏟아붓는다면 입주 작가들이 지역 사회에 기여할 방안을 충분히 마련할 것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