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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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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서바이벌의 시대

등록 2006-01-21 00:00 수정 2020-05-03 04:24

맘만 먹으면 클릭으로 초등학교 시절까지 알려지는 연예인들
작품 몰입 대신 쇼·뉴스로 ‘진짜 좋은 사람’ 호소부터 열중

▣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요즘 평범한 한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뭘까. 몇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아마 자신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일일 것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자신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오르는 순간 그는 모든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블로그 주소 공개는 기본이고, 신상정보나 사적인 모습도 거의 실시간으로 공개될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하지 않은 일까지 사실처럼 퍼질 수도 있고, 인터넷 언론들은 그것을 기사화할 수도 있다. 연예계는 이런 인터넷의 여론 형성 과정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분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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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만만> <…놀러와>가 무서운 이유

대다수 네티즌들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연예인들의 모든 행동은 품평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연예인이 되기 전 인터넷에 남긴 작은 댓글 하나도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대중은 더 이상 연예계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 그러기엔 네티즌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난해 있었던 ‘연예계 X파일’ 사건은 대중이 연예계에 대한 남은 환상마저 깨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최근 문화방송 <강력추천 토요일>에 신설된 ‘이미지 서바이벌’은 이런 대중의 인식을 반영한다. 1천 명의 사람들에게 정해진 연예인 후보군들 중 ‘가장 돈을 아낄 것 같은 연예인’처럼 특정 이미지에 부합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조사하는 이 코너는 대중이 연예인의 ‘사적인’ 이미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대중이 연예인의 사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어야 이 코너가 존재할 수 있다. 대중은 더 이상 한껏 꾸민 연예인들의 모습을 진짜라 믿지 않는다. 대신 그들도 우리처럼 똑같은 인간이고, 그런 그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진짜 ‘엔터테인먼트’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실제상황 토요일>의 ‘리얼 로망스 연애편지’나 <일요일이 좋다>의 ‘X맨’ 같은 코너들을 보라. 시청자들은 이 코너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커플 놀이’들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이성 연예인 앞에서 “사랑합니다”를 반복해도 방송이 끝나면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시청자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코너들은 그 속에 연예인의 사적인 모습들을 슬쩍 흘린다. ‘X맨’에서 자신과 커플로 공인된 윤은혜만을 아끼는 김종국의 모습이나, 김종국의 팬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마음을 알리는 채연의 행동은 각본과 실제 상황의 경계에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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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은 그들이 커플이 되는 건 가짜임을 알지만, 그런 설정 속에서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순간적인 반응들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그 연예인에 대한 호감도를 결정한다. 이런 ‘쇼’ 속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곧바로 좋은 이미지가 되고, 그 반대의 경우 네티즌들의 표적이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특히 SBS <야심만만>이나 문화방송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같은 토크쇼의 언행은 단 한 번의 출연으로도 연예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여기서 나오는 연예인의 이야기들이야말로 그들의 실제 모습을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잘하면 그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연예인도 순식간에 관심의 대상이 되고, 반대로 불쾌한 언행을 한 연예인은 몇 년간 쌓은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다. 몇몇 영화배우들처럼 아예 자신을 대중과 격리시키지 않을 바에야, 연예인들은 작품에서 비쳐지는 자신의 ‘캐릭터’ 이전에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공개하고, 그것을 적절히 공개하면서 그 자신을 엔터테인먼트의 소재로 제공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그들의 이미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X맨’에서 부드러운 남자의 이미지를 쌓은 뒤 앨범을 발표한 김종국은 연말 방송 3사의 가요대상을 휩쓸 정도로 높은 인기를 기록한 반면, 최근 <야심만만>에서 반말투로 토크를 했던 최민수는 순식간에 안티팬들이 생겨 개봉 전 영화의 흥행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매스미디어를 통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연예인 이미지 메이킹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강화된다.

연기자·가수 능력 보여주기 어렵네

콘텐츠의 완성도가 어느 정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면, 연예인의 사적인 이미지들은 다분히 감정적인 요인들에 의해 판단된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콘텐츠에 앞서 오락 프로그램이나 언론 기사를 통해 연예인의 ‘진짜’ 품성을 판단하려 하고, 인터넷을 통해 그것을 확대 재생산한다. 그래서 연예인들의 이런 모습을 자신들의 프리즘을 통해 강화하는 매스미디어는 더욱 큰 힘을 갖는다. 이들은 더 이상 대중문화 콘텐츠를 다루지 않고, 그 콘텐츠에 출연한 연예인의 사적인 모습을 캐내는 데만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벗어나 있는 연예인과 콘텐츠는 대중의 평가를 받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과거에는 대중이 좋아할 작품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연예인들의 초등학교 시절까지 몇 번의 클릭으로 알 수 있는 요즘은 연예인들이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팔아먹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대중이 작품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통로는 점점 더 줄어든다. 연예인들은 정말 자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서바이벌’해야 한다. 거기서 탈락하면 그들이 ‘연기자’나 ‘가수’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지고 있다. 분명히, 인터넷은 세상을 바꿨다. 하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연예인의 ‘진짜 모습’에 집착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연예인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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