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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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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퐝당한 시트콤은 없었다!

등록 2005-08-04 00:00 수정 2020-05-03 04:24

새로운 감수성 폭발시키고 26부작으로 일단락 지은 <안녕, 프란체스카>
기괴한 유머, 현실적인 가족애 보여준 뱀파이어들이여, 안녕!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안녕, 프란체스카>와 ‘안녕’할 시간이다. 지난 1월 시작한 <안녕, 프란체스카>는 8월1일 26부를 마지막으로 ‘오리지널 시즌’의 막을 내렸다. 루마니아 외전이 남아 있고, 시즌3을 시작할 예정이지만, 노도철 PD와 신정구 작가가 만드는 <안녕, 프란체스카>와는 작별을 했다. 숱한 마니아들을 만들면서 열광적인 성원을 이끌어낸 <안녕, 프란체스카>의 새로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최초로 성공한 난센스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의 핵심은 ‘뱀파이어 가족’이라는 설정에 녹아 있다. ‘뱀파이어스러운’ 기괴함과 훈훈한 가족애 사이의 조화와 긴장이 <안녕, 프란체스카>를 이끌어가는 힘이었다. 프란체스카(심혜진)가 목 잘린 인형을 수레를 끌고 다니는 장면의 황당함이 ‘유머’ 코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화투장을 보고 “바로크풍도 아닌 것이…”라고 감탄하는 것이 웃음을 자아낸 것도 뱀파이어라는 ‘알리바이’가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는 드라마의 엽기 코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훌륭한 설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즐겨!” “퐝당한 시추에이션” 같은 지금까지의 유행어와는 뭔가 다른 감각으로 만들어진 유행어가 ‘대박’을 터뜨렸다. <안녕, 프란체스카>는 한국에서 최초로 성공한 ‘난센스’ 시트콤이었다. 한국에서 인기를 얻은 시트콤은 <순풍 산부인과> 같은 가족 시트콤이거나 <논스톱> 같은 청춘 시트콤뿐이었다. 비현실적 설정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한국의 문화 풍토에서 뱀파이어라는 설정에 기반한 난센스 시트콤의 성공은 분명 문화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면에서 <안녕, 프란체스카>는 새로운 감수성의 당도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뱀파이어라는 기괴함이 엽기적인 유머 코드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다면, 가족애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골격을 이루는 주제였다. 거의 매회 가족과 관련된 주제들이 하나씩 녹아 있었다. <안녕, 프란체스카>는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뱀파이어 가족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혈연 같은 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실제 뱀파이어 가족은 26회의 방송을 이어가면서 웬만한 가족의 대소사는 한두번씩 치렀다. 매회 전반부는 코믹 코드로 뒤집어놓고, 후반부는 가족애로 정리하는 공식이 반복됐다. 때때로 가족애의 강조는 설교투로 흘러서 재미를 반감시켰다. 대부분의 ‘훈화 말씀’을 떠맡은 왕고모의 캐릭터가 충분히 웃기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녕, 프란체스카>가 선보인 ‘가족 안에서의 일탈’이라는 코드는 한국 시트콤의 진화와 한계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아직 ‘가족’의 틀을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하지만, 가족 안의 갈등과 변화를 담고 있는 것이다. 뱀파이어 가족은 평범한 가족이 아니었다. 질서가 뒤엉킨 가족이었다. 가장 어려 보이는 왕고모가 (가장) 연장자가 되는 ‘뒤집어진’ 가족, 두일이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무능력한 가족은 가족주의의 신화에서 벗어나 현실의 가족을 반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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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초반을 이끌어가는 힘은 대부분 프란체스카의 캐릭터에서 나왔다. 프란체스카는 ‘깜장 드레스’를 입고, 고스톱에 열광하고, 도끼를 들고 설치지만 묘하게 귀여웠다. “즐겨!”라는 살짝 명령투의 말에는 프란체스카의 쿨함과 황당함이 잘 요약돼 있다. 여기에 인간이었던 두일이가 프란체스카와 사랑하고 갈등하면서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프란체스카와 두일이가 ‘닭살 커플’이 되면서 인간과 뱀파이어의 사랑과 갈등이라는 웃음의 매개체가 사라졌다. 이 자리를 메운 것은 안성댁의 켠을 향한 일편단심이었다. 안성댁과 켠은 부조화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관계였다. 안성댁은 닳고 닳은 꽃뱀으로 설정돼 있었고, 켠은 ‘닭’이라는 별명을 지닌 바보 캐릭터였다. 게다가 안성댁은 인간이었고, 켠은 뱀파이어였다. 안성댁은 (설정상) 중년이었고, 켠은 (외모상) 청년이었다. 어쩌면 닳고 닳은 안성댁이 바보 같은 켠을 사랑한다는 ‘설정’은 시트콤적으로 보면, 약간 과감하지만 조금 상투적이었다.

“켜켜러러켠” 안성댁이 켠을 부를 때

하지만 <안녕, 프란체스카>가 탁월한 점은 도덕 관념에 굴복해 안성댁과 켠의 관계를 중간에 정리하지 않고, 둘의 관계를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황당해 보이던 안성댁의 일편단심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었다. 남편 4명을 ‘잡아먹은’ 안성댁이 겪었을 인생의 신산함과 사랑의 처절함이 바보 켠을 향한 일편단심에는 거꾸로 녹아 있었다. 극단의 상처를 극단의 순수함에서 위로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숨어 있었다. 안성댁이 “켜켜러러켠”이라고 켠을 부를 때, 처음엔 우스웠지만 나중에는 애절해졌다. 안성댁이 켠에 대해 “저렇게 뻔하게 접근하는데도 이상하게 좋단 말야”라고 중얼거릴 때, 처음에는 설정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느껴졌다. 안성댁이 “먹어도 먹어도 자꾸 땡끼는 불량식품 같은 남자”인 켠과 ‘맺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성댁의 일편단심은 한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황당하지만 가장 애절한 사랑 중 하나였다. 안성댁의 일편단심은 사랑의 상처로 지친 이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켠의 백치미는 관계의 부대낌에 지친 이들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그것은 둘의 캐릭터가 끝까지 사랑받은 이유였다.

무엇보다 <안녕, 프란체스카>는 신선한 유머 코드로 승부했다. 화투 속 그림이 실물로 살아나오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마법처럼 유머 코드로 바뀌었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메오들이 색다른 웃음을 만들어냈다. 퀴어 코드도 유머 코드로 끌어들였다. 켠의 성정체성은 모호하게 그려졌고, 안성댁은 진정한 퀴어 캐릭터였다. 귀걸이부터 말투까지, 안성댁 캐릭터의 바닥에는 드랙퀸 혹은 트랜스젠더의 이미지가 깔려 있었다. 물론 <안녕, 프란체스카>는 후반부에 자신들의 유머 코드를 자기 복제하는 한계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뱀파이어 가족이 개척한 유머의 영역은 지금껏 불모의 땅이었다. 다시 이런 시트콤을 볼 수 있을까. 또다시 슬픔이 밀려온다. 안녕, 프란체스카!



“가족에도 노력이 필요하지 않더냐"


[인터뷰/ 신정구 작가]

더 ‘세게’ 갈 수도 있었지만 어린 시청자들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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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프란체스카>의 신정구 작가를 만났다. 그는 <안녕, 프란체스카>를 통해 가족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말에도 가족의 중대한 사건을 담았다. 결말은 이미 3~4회 촬영을 할 때부터 생각해두었다고 한다.

<안녕, 프란체스카>는 매우 엽기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가족의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가족이 취향은 아니다. (웃음) 얼마 전 아주 ‘잘나가는’ 여배우와 술을 마셨다. 그 여배우조차 술이 들어가자 “가족만 없었다면…”이라고 술주정을 하더라. 그만큼 누구에게나 가족은 부담일 수 있다. 하지만 대중매체에서 가족의 당위를 다루는 이야기만 많지, 가족의 현실을 다룬 작품은 적었다. <안녕, 프란체스카>를 통해서 가족들 사이에도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끔씩 가족애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개인적 취향이라면 가족 이야기 없이 더 ‘세게’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책임, 공중파의 특성도 생각해야 했다. 자아가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어린 친구들이 시트콤을 본다. 그들을 고려했다. 예전에 <두근두근 체인지>의 결말도 그랬다. 주인공이 마지막 남은 샴푸를 쓰면, 예쁜 외모가 되는 대신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샴푸를 모두 쓰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결말은 그렇게 가지 않았다.
안성댁의 캐릭터가 많은 인기를 누렸다.

안성댁이야말로 진정한 퀴어 캐릭터다. 주변에 게이, 레즈비언이 많다. 어느 날 친구가 술을 마시다가 “밑도 끝도 없이 건방져지는 이 기분이 너무 좋아”라고 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거기에서 안성댁의 캐릭터가 나왔다. 켠의 캐릭터는 <프랜즈>의 조이에 메트로섹슈얼 이미지를 더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켠의 캐릭터가 지금과는 약간 달랐던 셈이다. ‘켠이는 다정한 사람을 좋아해’ 편을 하면서 켠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잡혔다.
노도철 PD와의 호흡은.

우리의 취향은 상당히 다르다. 나는 극단적인 컬트 감수성을 가지고 있고, 미친 듯이 폭주하는 타입이다. 노도철 PD는 ‘코스’를 착실하게 밟아온 사람이다. 객관적인 시선을 지녔다. 노 PD와의 작업이 결과적으로 균형을 잡게 했다는 점에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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