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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드라마’ 대박 어렵네

등록 2005-02-24 00:00 수정 2020-05-03 04:24

<봄날>이 시청률 30%에서 떨어진 이유… 80’신파멜로-90’트렌디물 잇는 요즘 드라마, ‘폐인’ 만들고 끝?

손원제 기자/ 한겨레 여론매체부 wonje@hani.co.kr

방송가에선 흔히 드라마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지표로 시청률 20%를 든다. 20%를 넘으면 일단 본전은 넘어 흥행작 대열에 끼었다고 본다. 30%는 대박이냐 아니냐의 경계다. 30%를 넘는 시청률은 그만큼 드물다. 2004년만 해도 30%를 넘은 드라마는 <대장금>과 <발리에서 생긴 일> <천국의 계단> <파리의 연인> <풀하우스> 정도였다. 지난 연말 강력한 드라마 폐인 바람을 불러왔던 <미안하다, 사랑한다>도 끝내 30%는 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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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만 놓고 보면, SBS 주말 드라마 <봄날>을 두고 최근 일부에서 일고 있는 시청률 논란은 불가사의한 면이 있다. <봄날>은 지난 1월8일 첫회 시청률이 무려 26.9%(닐슨미디어리서치 집계)를 기록하면서 뜨거운 흥행 돌풍을 예고했다. 이 수치는 <태조 왕건>(32.9%)과 <제국의 아침>(31.9%)에 이은 역대 드라마 첫회 시청률 순위 3위에 해당한다. <봄날>의 시청률 호조는 그 뒤로도 계속돼 방송 6회 만에 드디어 대박 기준점인 30%를 넘어섰다. 시청률상으론 <봄날>은 일찌감치 남들이 다 부러워할 대박 고지에 올라선 것이다.

“인물 너무 어두워" “줄거리 답답해"

그럼에도 시청률 논란에 불이 붙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난 1월29일 이후 <봄날>의 시청률은 오히려 하강 국면에 접어든다. 지난 2월5일 29.2%를 기록하며 다시 20%대로 내려선 데 이어, 6일엔 26.8%까지 떨어졌다. 이후 지금껏 30%를 회복하지 못한 채 20% 후반을 오르내리고 있다. 바로 이 점을 두고 일부에선 <봄날>의 시청률 답보 원인을 여러 각도로 풀이하는 등 논란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마디로 왜 초반 열풍에도 불구하고 30%대로 파죽지세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아직 20%대에도 이르지 못한 대다수 드라마들로선 눈을 단단히 흘길 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봄날>을 둘러싼 이런 논란엔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다. 그건 <봄날>의 시청률을 답보로 이끄는 요인에 대한 몇몇 분석들이다. 이는 <봄날>이라는 드라마가 드러내고 있는 한국 드라마의 어떤 색깔과 흐름에 대한 단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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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부진(?)에 대한 이유로 열혈 시청자들은 정은(고현정)과 은호(지진희), 은섭(조인성) 세 주인공의 고난과 역경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는 등 드라마 분위기가 계속 어둡고 우울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대체로 꼽고 있다. ‘hyunru’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드라마 게시판에 “고현정씨 캐릭터가 지나치게 어둡고 무겁다. 상황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답답하고 매력 없이 느껴진다”고 썼다. 또 ‘wjddus905’는 “기본적으로 괜찮은 드라마지만, 시청률을 위해서는 뭔가 아쉬운 점이 있다”며 “은섭은 매회 울고, 정은은 매일 집을 나와 걷고… 은호는 여전히 답답한 기억의 미로에서 헤매고…”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은호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옛 애인인 민정(한고은)이나 은섭이 집을 나가 동거하는 여인 등 새로운 캐릭터의 잦은 등장이 극 전개를 흩트리고 시청자의 몰입을 막는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봄날> 캐릭터를 특징짓는 내면의 상처와 어두운 그림자는 드라마 초반부터 드러난 바 있다. <봄날>의 극중 배역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깊은 심리적 상처를 가진 존재들이다. 은섭이 가장 심각하다. 그의 내면엔 형 은호에 대한 열등감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집착에 가까운 어머니의 과잉애정 따위가 얽히고 꼬여 있다. 이런 내상은 심각한 병적 징후로 드러난다. 첫회 그는 구두에 살짝 얼룩이 지는 것조차 참지 못할 만큼 결벽증이 심각한 인물로 그려진다. 더구나 피만 보면 이성을 잃고 극심한 두려움에 떤다. 그의 직업인 의사로선 치명적인 결격 사유다.

<네멋대로…>이후… 젊음의 상처에 주목

정은 또한 초반 바깥 세계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자발적 실어증을 앓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는 어머니한테 버려진 데 대한 분노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를 두고 재가했다. 그는 유일한 탈출구로 여겼던 피아니스트의 꿈이 좌절된 직후 어머니의 위로를 찾아나섰으나,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거듭 덧난 영혼의 상처는 그를 침묵 속에 가둔다. 그는 잇자국이 남고 피가 맺히도록 손을 물려도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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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은호의 영혼 또한 알고 보면 상처투성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떨어져 새어머니의 질시와 견제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관심을 뿌리치는 정은에게 소리친다. 거기엔 그의 깊은 상처의 흔적이 드리워 있다. “나 울 엄마 열살 때 보구, 지금까지 한번두 못 봤다. 불쌍하지? 근데두 난 너처럼 울어보지두 못했어. 진짜 불쌍하지? 소리내서 울어. 니 소리에 묻혀서 나두 좀 울게.”

이들이 겪는 정서적 결핍과 심리적 상처의 색깔 또한 비슷하다. 그 결핍과 상처의 뿌리는 한결같이 존재의 기원인 가족이다. 은섭의 병적 태도는 어머니의 자살 시도를 지켜봐야 했던 어린 시절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며, 정은과 은호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가여운 어린아이의 내면을 갖고 있다.

<봄날>은 이들의 결핍과 상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주인공은 물론 주변 인물들 모두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처 입은 내면이 이끄는 방식대로 타인과의 소통을 갈구하며, 우여곡절 끝에 상처의 치유에 다가선다. 그건 마치 ‘사이코 드라마’와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가족사로부터 상처 입은 심리적 장애인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봄날>은 ‘사이코 드라마’와 많이 닮은꼴이다.

<봄날> 이전에도 젊음의 심리적 결핍과 상처를 다룬 드라마는 있었다. <청춘의 덫> 같은 김수현의 연애 심리극은 대표적 사례다. 김수현의 칼날 같은 대사들은 열등감과 상처로 얼룩진 인물들의 내면을 포착해 드러냈다. 이종원과 배용준이 나왔던 <젊은이의 양지> 또한 일그러진 가족관계가 젊은 영혼에 남긴 상처의 흔적들을 여럿 포함하고 있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그러나 이런 드라마들은 아직 그 내면의 상처를 배경으로 제시할 뿐, 내면의 동요와 치유, 또는 파멸의 여정을 따라가는 완결적인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드라마 속 상처 입은 젊은 영혼의 내면과 그 치유의 여정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드라마를 발견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2002년 문화방송이 방영한 <네 멋대로 해라>를 그 원조격 드라마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드라마는 기성의 사회제도로부터 억압받고 상처 입은 젊은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복수(양동근)와 경(이나영)은 모두 지리멸렬한 가족사의 상처를 안고 있으며, 그 가족사의 상처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그들의 삶에 두꺼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드라마는 그 내면의 상처를 각각의 인물들이 서로 위무하고 보듬어가는 여정으로 드러낸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아픈 상처를 결코 처절하지 않고 ‘쿨’하게 풀어가며, 그런 ‘쿨’함은 신세대 젊음의 새로운 감성과 삶의 방식으로 주목받았다.

이런 드라마의 방식은 이후 <발리에서 생긴 일>과 <아일랜드>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에 그 흔적을 새기며 한국 드라마의 새로운 흐름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발리에서 생긴 일>은 각기 다른 열등감에 시달리는 남녀 주인공들의 심리적 상처를 계급의 맥락 속에 배치함으로써 새롭게 풀어간다. 극의 전개는 그 심리적 상처에서 기인해 끝내 세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나는 인물관계의 발단과 발전, 파멸과 같은 궤를 걷는다. 화해로운 치유 아닌 파국을 결말로 하지만, 심리적 내상의 전개라는 점에서 동일한 흐름을 이룬다.

심리묘사 부각에 ‘사건 전개’ 더디네

<네 멋대로 해라>의 인정옥 작가가 지난해 새롭게 내놓은 <아일랜드>나 <미안하다, 사랑한다> 역시 내면의 상처로 가득한 주인공들이 소통과 치유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내용이자 주제다. 1980년대까지의 드라마들이 신파적 멜로물에, 1992년 문화방송 <질투>를 시작으로 붐을 이룬 트렌디 드라마가 일반적으로 젊고 매력적인 도시 청춘남녀의 휘황한 사랑 이야기에 집중했던 것과는 뚜렷하게 다른 흐름이다. 신파멜로나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 모두 인물의 상처 입은 내면과 감정선의 변화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극의 흐름을 이어간다는 특징을 갖는다.

새롭게 대두하는 드라마들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시청률을 포함한 시청자의 몰입도와 관련돼 있다. 이런 흐름의 드라마들은 모두 젊은 네티즌을 중심으로 강력한 드라마 폐인 문화를 형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세대의 상처를 짚어내는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공감과 호응, 몰입이 그만큼 깊고 강렬한 것이다. 그러나 시청률에선 전반적으로 폐인 문화가 발산하는 열기만큼의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 <발리에서 생긴 일>이 막판 30%를 넘겼을 뿐, 거개는 30%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네 멋대로 해라>는 14~15%, <아일랜드>는 10%대를 오가는 시청률을 보였다. 세대적 감수성에 기반한 심리 위주의 내용 전개가 광범한 시청층의 결집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에서 <봄날>이 봉착한 지금의 시청률 논란 또한 이해될 법하다. 고현정 효과’와 조인성, 지진희 등의 스타파워로 30% 진입까진 훌쩍 이르렀지만, 드라마의 색깔이 지속되면서 갈수록 사건 위주의 빠른 전개를 요구하는 시청층의 유입 동기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건 <봄날>의 가능성이자 족쇄이다. 가족관계가 낳은 내면의 상처 중심으로 끌어가는 극 전개는 기존 드라마 문법과 다른 신선한 느낌을 낳지만, 대박 달성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봄날>은 이제 은호, 은섭 형제와 정은 사이 본격적인 삼각관계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다. 가족사의 상처와 치유에 지속적인 관심을 둘 건지, 아니면 이를 삼각관계로의 진입을 위한 단순한 배경으로 소진할 것인지, <봄날>은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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