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루프>로 무대 오른 추상미… 사유의 몸짓으로 배우 인생 전반부를 화려하게 수놓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다시 1년6개월여 만에 연극 <프루프>(3월13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의 캐서린 역으로 무대에 오른 추상미. 무대 밖이라 해서 수수께끼 같은 캐서린의 체취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듯했다. 천재 수학자인 아버지의 광기를 물려받은 딸로서 예민한 감성을 드러내는 캐서린의 흔적이 그의 세포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커다란 눈동자만큼이나 명쾌한 말투로 무대에서의 캐서린을 말하는 동안에 현실과 연극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잠시도 캐서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캐서린이 그의 내면에 숨어 있던 광기를 불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대 안의 캐서린과 무대 밖의 추상미의 간격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샹송 뮤지컬, 작가주의 영화, 종횡무진
요즘 추상미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무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초까지 뮤지컬 <빠담빠담빠담>의 에디트 피아프 역을 맡아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 등 솔로 곡을 포함해 모두 10곡을 들려줬다. 당시 그는 “누구든 500번 이상 노래를 부르면 잘 부를 수 있다”는 음악감독의 말에 따라 곡마다 수백번씩 연습하는 기염을 토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해 샹송이 전혀 새로운 장르는 아니었다. 앞서 2002년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출연해 클래식한 곡을 소화하며 기본기를 다져놓은 게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로 피아프의 노래와 사랑에 대한 열정을 올해 초까지 지방도시를 오르내리며 쏟아냈다.
1994년 <로리타>로 데뷔한 추상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을 만났다. 당돌하고 유혹적인 로리타로 대중에게 불현듯 다가온 그의 캐릭터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껍질을 까도 고갱이에 다가서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리라. 그는 연극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크게 주목받았다. 주인공 ‘나’와 나의 자기분열체인 ‘그’의 아내를 연기하는 그는 “무대를 펄펄 날아다녔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영화 <꽃잎>과 <접속>으로 스크린을 스쳐 지난 뒤, <퇴마록>의 승희로 색깔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에 몸서리치는 연기는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한동안 추상미는 ‘인디 여배우’가 되어달라는 ‘러브콜’을 쉴 새 없이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대중 앞에 화려하게 나서지 않더라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는 여배우의 면모를 그에게서 발견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서 선영 역으로 일상과 연기의 경계를 넘나들며 복잡미묘한 연기의 맛에 빠져들었다. 그는 선영을 떨칠 무렵, 작가영화라 불리는 박경희 감독의 <미소>에서 소정 역으로 다시금 일상성의 자장에 깊이 빨려들었다. 심지어 촬영까지 마치고 두 해를 넘겼지만 개봉은 감감무소식인 작품도 있다. 파격적인 예술을 통한 고품격 대중영화를 추구한다는 전인수 감독의 <파괴>가 그렇다.
그렇다고 추상미가 작가영화 대표 배우쯤으로 자신의 연기 세계를 자리매김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배우와 달리 “독립영화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치기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연기를 한마디로 규정하고, 규정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최근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영국의 독립영화 <어바웃 아담>을 코미디와 판타지를 가미해 리메이크한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서였다. 이런 선택의 배경에 연기에 대한 남다른 욕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상업영화로 분류되는 작품은 제작 시스템이 합리적이지만 색깔에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비해 독립영화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작품이 완성되기에 배우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연기의 폭을 넓히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대배우의 딸, 수학자의 딸을 연기하며…
그렇다면 추상미의 연기세계에서 연극 <프루프>는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일까. 그에게 <프루프>는 자신을 ‘증명’하는 무대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캐서린은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에서 검정 드레스를 입은 것을 빼면 줄곧 평상복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과 옷차림으로 일상적인 감정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캐서린과 아버지의 제자인 수학교수 핼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이 싹튼 뒤, 갑작스럽게 등장한 수학공식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학업을 중도에 그만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수학공식의 증명, 그것은 캐서린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그 역시 무대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증명한다.
“말이 돼? 40페이지나 되는 걸 보지 말고 얘기하라구? 이게 스파게티 조리법인 줄 알아? 말도 안 돼. 내 노트고, 내 글씨, 내 열쇠, 내 서랍, 내 증명이야!” 이렇게 절규하는 캐서린은 광기와 천재성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수학자의 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슴속에 ‘앙금’을 간직하고 살아온 추상미의 존재 증명이기도 했다. 수학자의 딸 캐서린을 통해 대배우의 딸 추상미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든 부모로부터 유전적 기질을 물려받게 마련이죠. 한때는 어버지(추송웅)로부터 물려받은 기질 가운데 취사선택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좋고 싫음을 따지기보다는 제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연극 <프루프>는 추상미의 ‘살풀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무대 한쪽에서 웅크려 떨고, 감춰진 감정을 폭발하는 캐서린에 관객들이 숨죽인 채 몰입하는 것은 그의 광기가 오롯이 살아났기 때문이리라. 원작자 데이비드 어번의 우아한 대본을 번역자 이항 교수(한양대 의대)가 정갈하게 요리했다면, 추상미는 ‘타고난’ 식성으로 맛나게 먹어치운 셈이다. 물론 초연 때 깊은 맛을 우려내지 못한 채 입 안에 넣었던 아쉬움도 충분히 씻어냈다. 그것은 캐서린의 이중적 감정을 ‘흉내’내려 하지 않고 새롭게 해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연 때는 광기의 본능에 의지했다면, 이번에는 광기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무대가 제격인 추상미를 만날 수 있다.
“뮤지컬 배우로서 폼나는 무대에서 자아도취도 경험했고, 연기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연극에서 깊이 있는 심리 연기의 맛에 빠져들고 있죠. 어디에든 머물러 있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제 ‘추상미의 프루프’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프루프>를 번역한 이항 교수는 “캐서린은 추상미를 위한 최대의 배역”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 무대에 오르는 게 연기인생 후반기의 꿈이라면, <프루프>는 전반기를 화려하게 수놓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릴리 테일러나 줄리엣 루이스 혹은 량차오웨이(양조위)처럼 어느 순간 강렬한 느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그의 예술적 광기는 캐서린을 넘어 또 다른 변신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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